Computer Assisted Reporting. 일반적으로 CAR로 불리는 보도 방식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간다. 아직 개인용 컴퓨터는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대부분의 컴퓨터는 미국의 군사 목적으로 개발돼 특수 목적용으로만 활용되던 시기였다. 컴퓨터 자체도 귀했지만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는 이 또한 희소하던 때였다.

1952년은 저널리즘과 컴퓨터가 사실상 처음으로 조우한 시점이다. 그해 미국은 대통령 선거로 어수선했다.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우어와 민주당 후보 스티븐슨은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양상을 주도했다. 당시 대외적으로는 2년 전 발생한 한국 전쟁으로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충돌하고 있었고 미국 내부에선 매카시의 마녀사냥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향한 보수 진영의 이념몰이가 최고조에 달하던 때였다.

몇 년 전 발생한 2차 대전은 컴퓨터 기술의 질적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거의 모든 컴퓨터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된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1946년 개발된 ENIAC도 미국 육군의 주도로 펜실베니아 대학 무어 전자 엔지니어링 스쿨과 협업을 통해 탄생한 결과물이다. UNIVAC도 ENIAC의 연구의 파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ENIAC 개발에 직접 참여한 펜실베니아대학 J. Presper Eckert과 John Mauchly은 1947년 대학을 뛰쳐나와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각자의 성을 따와서 The Eckert–Mauchly Computer Corporation (EMCC)으로 명명했다. 애초 회사명은 the Electronic Control Company지만 법인을 설립하면서 EMCC로 변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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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굳이 대학 연구소를 관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팬실베니아 대학은 학교 이름의 계약으로 획득한 기술적 지적재산은 대학이 소유한다는 정책적 원칙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ENIAC 개발 과정에서 취득한 기술력 그리고 이를 통해 설계한 EDVAC은 온전히 대학의 소유가 될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대학의 지적재산권 정책에 부당함을 느끼고 대학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이들이 곧바로 언론사를 접촉한 것은 아니다. Mauchly은 1948년 미국 인구조사국을 설득해 EDVAC II 개발 계약을 따냈다. 인구조사 방식의 혁신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당장 1950년 인구조사 때부터 활용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이들의 첫번째 대형 계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이후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UNIVAC 개발을 위한 용역 계약을 미국 육군, 공군, 해군으로부터 의뢰받았지만, 매카시 열풍에 공산주의에 경도된 회사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모두 취소됐다. Mauchly는 회사 내 대표적인 공산주의 지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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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투자금 확보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바닥났다. 결국 회사는 미국 내 대표적인 총기 제작 업체이자 비즈니스 기계 제조업체인 Remington Rand에 1950년 매각됐다. J. Presper Eckert과 John Mauchly는 Remington Rand의 UNIVAC 본부에 배속됐고 계속적으로 이 연구 및 개발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은 미국인구조사국에 UNIVAC을 납품한 뒤 자신감을 갖고 영업망을 확대했다. 그리고 1952년 여름, Remington Rand의 임원이 CBS 뉴스의 보도국장격인 Sig Mickelson을 찾아갔다. 시청률 1위 방송사인 NBC는 the Monroe Calculating Machine Company가 제작한 표 제작용 컴퓨터 Monrobot을 사용하기로 확정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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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ington Rand의 임원은 이 자리에서 “UNIVAC을 활용하면 올해 대선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미국 인구조사 방식에 활용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과거 투표 데이터 패턴을 UNIVAC으로 분석하면 정확한 선거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선거 결과 예측 방식인 셈이다.

CBS 측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되받았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리 밑질 것 없는 장사인 듯했다. NBC의 Monrobot보다 한층 더 센세이셔널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 엔터테이닝 측면에선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판단으로 돌아서면서 본격적으로 예측 작업에 착수하게 됐다. 대선 결과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예측을 위한 저널리즘적 목적보다 과시(showing)와 엔터테인먼트라는 선정적 목적이 좀더 강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CBS는 대통령 선거방송 당시 스튜디오 내에 가짜 모형 UNIVAC을 설치했다. 실제 선거예측 결과를 계산하던 UNIVAC은 Mauchly의 집안에 남겨져있었다. 대선 방송 시청률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Walter Cronkite 기자는 컴퓨터 활용 보도의 선구자라고 치켜세우기엔 부족함이 적지 않다. 그는 당시 앵커였을 뿐, 선거 예측을 위한 세밀한 데이터 분석 설계나 작업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J. Presper Eckert과 John Mauchly 등이 분석한 자료를 다양한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CBS와 Remington Rand는 투표율 기반의 결과 예측 알고리즘을 도출하고 본격적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저널리즘을 위해 고안된 첫번째 컴퓨터 알고리즘인 셈이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접전 혹은 스티븐슨의 우위를 점치던 기존 여론조사와 달리 예상을 깨고 아이젠하우어의 승리를 산출물로 뽑아낸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 우위라는 의외 이상의 의외의 결과치를 제시한 것이다. 편향됐다는 비판적 목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방송국 내 관계자들은 이를 보도하는데 망설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했다. 예상 외의 결과였기에 더욱 그랬다. 불편해하는 이들의 설득을 거쳐 마침내 방송으로 내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CBS는 컴퓨터의 예측치를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조롱까지 당했다. 하지만 결과는? 결국 UNIVAC의 예측대로 아이젠하우어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컴퓨터와 저널리즘의 만남은 이렇게 아슬아슬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