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지금의 한국은 90년대 이후 일본과 유사한 면을 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졌고 ▲고령화에 따른 부양 부담이 크고 ▲부채가 많아 소비와 투자 여력이 작아지며 저성장 국면에 돌입했단 점입니다.
[Report] 한·일 저성장 비교 : 현재 한국은 30년 전 일본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IBK 기업은행 경제연구소)
그렇다면 다가오는(어쩌면 이미 진행 중인) 저성장 국면을 앞두고, '90년대 일본의 소비 트렌드는 어땠으며, 어떤 서비스가 부상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국내 경제가 정말 저성장기에 돌입했는지, 향후 국내 산업의 트렌드는 어떨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가성비vs프리미엄: 뚜렷한 소비 양극화
90년대 일본에선 소비 양극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버블이 붕괴하며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 수준이 감소한 결과인데요. 한쪽에선 절약을 위한 가성비 상품을, 한쪽에선 과감히 높은 가격을 지불할만한 프리미엄 상품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카테고리별 소비 트렌드를 살펴볼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소비의 양극화는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두루 나타났습니다.
외식
일본 외식업계는 9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도쿄거래소에 상장된 프랜차이즈 기업 90여개 중 90년대 이전에 상장한 곳은 '키소지(Kisoji)' 한 곳뿐일 정도입니다.
외식업 시장의 사이즈를 키운 건 주로 가성비 프랜차이즈였습니다. 마츠야(松屋), 스키야(すき家) 등 저가 프랜차이즈는 9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가장 큰 단위의 동전인 500엔 이하로 한끼를 즐길 수 있는 'One coin lunch' 상품이 인기를 끌고, 일본 여행의 묘미로 자리잡은 '가성비 편의점 상품'이 발달한 것도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90년대부터였습니다.
동시에 프리미엄 소비 성향도 늘어났는데요. 가성비 소비가 주로 '끼니' 위주로 이뤄졌다면, 프리미엄 소비는 주류(酒類) 위주로 이뤄졌습니다. 90년대 들어'아사히' 등 주류 기업들의 프리미엄 라인업과 유럽에서 건너 온 고급 와인과 위스키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고 하네요.
의류
의류 분야에서도 SPA와 명품이 동시에 인기를 끄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90년대부터 유니클로 등 저가의 기획 의류상품을 직접 제조 및 유통하는 SPA 브랜드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2인 이상 가구의 의류와 장신구 구입액은 버블 붕괴가 일반 가구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직전인 1991년(연간 30만2,328엔)에 정점을 찍은 뒤 꾸준히 하락했습니다.
반면 명품 시장은 90년대에도 쉽게 고꾸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명품시장은 1996년, 약 1조9천억엔(26조2300억원)으로 정점을 기록할 때까지 꾸준히 성장했으며 그후에도 매년 1%대 수준의 완만한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쇼핑
쇼핑은 다른 분야에 비해 가성비 소비의 증가세가 크게 나타난 분야입니다. 일본에선 모든 상품을 100엔 단위 균일가로 판매하는 형태의 생활품 판매점(이른바 '100엔 샵')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생필품뿐만 아니라 중고 게임, DVD, 책에 대한 수요도 늘었으며, 저가형 전자기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위는 94, 99, 04년 일본 국민의 구입처별 소비지출액을 측정한 표입니다. 백화점에서의 소비가 줄어들고 편의점과 슈퍼마켓에서의 소비가 크게 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도 90년대 일본처럼 소비의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치솟는 물가에 가성비 상품들이 주목받고 있는 건 비슷합니다. 편의점 '혜자 도시락'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대학가의 '천원 식당'이나 지자체의 식비 지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탑텐', '유니클로 코리아', 'SPAO', '에잇세컨즈' 등 SPA 브랜드들의 국내 매출도 최대 2배까지 증가했습니다. 중고거래 플랫폼이 발전한 덕분도 있겠지만, 중고 거래액도 1~2년 사이에 크게 늘어났습니다.
동시에 명품이나 프리미엄 소비도 꽤 빠르게 증가 중입니다. 한때 '오마카세 열풍'이 불기도 했으며, 하이엔드 식당의 인기는 여전히 많습니다. 백화점 매출이 감소했던 90년대 일본과 달리, 국내 백화점 3사(신세계, 롯데, 현대) 모두 올해 매출이 증가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지금 우리나라는 90년대 일본과 같이 소비의 양극화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다만 명품이나 프리미엄에 대한 수요는 일본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소비 양극화는 저성장보다 고물가의 영향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어쩌면 과시와 비교를 좋아하는 문화의 탓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과 인구구조, 그리고 가구와 기업들의 재정 상태까지 유사한 만큼 우리나라와 90년대 일본 간 소비 트렌드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라 경기 침체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