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사태
꽤 시간이 지났지만, SVB 사태를 간단히 되돌아보겠습니다. SVB는 실리콘밸리에선 가장 큰 약 2100억달러 규모를 가진 은행입니다. 주로 스타트업의 예금과 대출을 담당하며 ‘스타트업의 은행’이라 불렸습니다.

스타트업은 보통 자기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투자를 필요로 합니다. 근 몇년 간은 벤처캐피탈(VC) 투자 규모가 크게 늘어나며 스타트업이 많은 현금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VC 규모가 큰 미국의 스타트업은 많은 양의 현금을 은행(주로 SVB)에 예금한 뒤 이를 자본으로 사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큰 규모의 대출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SVB 같은 은행의 입장에선 예금액은 늘어나는데 이를 대출해줄 곳(은행에게 이자를 줄 곳)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SVB 입장에선 자금을 투자할 곳을 찾아야 했고, 그게 미국 국채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작년부터 금리를 빠르게 빠르게 올리기 시작하자 채권 가격은 뚝뚝 떨어졌습니다. SVB는 만기가 10년 이상인 장기채를 엄청나게 사들였기 때문에(자산의 약 45%) 보유 자산 가치도 장기채 가격을 따라 뚝뚝 떨어졌습니다.
장기채를 판매하기엔 가격이 너무 떨어졌고, 만기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SVB의 유동성은 크게 악화했습니다. 엔데믹으로 SVB 고객의 큰 비율을 차지하는 테크 기업들의 실적도 악화하며 예금액도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SVB의 유동성 경색을 걱정했습니다.
결국 국채를 매각하고 큰 손실을 보자 SVB 주가는 70% 가까이 급락했고 뱅크런이 시작됐습니다. 3월 9일 하루 동안에만 420억 달러가 인출됐다고 합니다.
사실 SVB 입장에선 억울할 것입니다. 미국 국채라는 지극히 안전한 자산에 투자했고, 금리 인상 등 몇가지 악재가 겹친 단기적인 어려움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경기침체로 인한 불안함과 집단적인 조급함이 낳은 피해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스타트업도 위기
아무튼 결과적으로 SVB는 파산했습니다. SVB는 미국의 파산 은행 중 역대 2번째로 큰 규모였던 만큼(역대 최대 규모는 2008년 워싱턴 뮤추얼) 파장이 큽니다. 이른바 Death Valley(기업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내기 전에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시기)라 불리는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에게 SVB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런 SVB가 파산했으니 스타트업 시장과 테크 산업은 다소 위축될 것으로 보입니다.
SVB 파산은 은행은 물론 투자자들이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을 가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유동성이 불안한 낌새를 조금만 보여도 대규모 뱅크런이 벌어질 수 있단 걸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은행이든 투자자든 리스크 관리를 엄청나게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관리 비용이 증가한 것입니다.
스타트업과 테크 기업들은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졌기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스타트업은 특히나 파산 리스크가 매우 크고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을지 불확실성도 크기에 자금을 조달할 곳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SVB, 그 다음은 결국 월스트리트
다행히도 SVB 파산이 경제 위기로 직결되진 않았습니다. SVB의 뒤를 이어 파산 위기에 빠진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은 금융당국과 JP모건, 골드만삭스, 시티그룹 등 월스트리트 은행의 자금 덕에 간신히 살아는 있는 상황입니다.
SVB가 파산하고, 꽤나 규모가 큰 은행들이 줄줄이 위기에 처할수록 결국 돈이 모이는 곳은 월스트리트인 듯 합니다. 다만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SVB처럼 스타트업들에 우호적이진 않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사정이 전에 비하면 어려워질 거란 점은 여전합니다.
한편 SVB 파산이 이른바 ‘실리콘밸리식’이라 불리는 스타트업/테크 기업 특유의 속성 때문이란 지적도 있습니다. 기술 칼럼니스트 케빈 루스(Kevin Roose)는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SVB의 주요 고객이 테크 스타트업이 아니었다면 파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해당 기업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활용해 타 기업/소비자의 동향을 살핍니다. 일부가 SVB의 유동성에 의심을 품자 업무 메신저와 SNS를 통해 그 의심은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게다가 거래도 스마트폰으로 매우 빠르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곧바로 뱅크런, 파산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경제 위기?
일단락은 됐지만, 미국 정부도 SVB 파산이 ‘경제 위기의 전조’일 수 있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자넷 옐런(Janet Yellen) 재무부 장관은 SVB 파산을 본 은행들이 대출 기준을 강화하며 시장 전체의 유동성이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스타트업과 테크 기업의 위기는 곧 전체 산업의 생산성 감소로 이어지고, 고용과 투자의 중단으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모든 산업이 제자리 걸음 혹은 뒷걸음질을 치게 되겠죠.
Fed는 물론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기조에도 제동이 걸렸습니다. SVB 파산에 결정타를 날린 게 금리 인상이었기 때문에 금리 인상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월 5일, 우선 호주 중앙은행(RBA)은 작년 5월부터 10차례 연속으로 올려왔던 금리를 이번엔 동결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금리 인상 효과가 경제에 완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주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금리 인상이 얼마나 영향이 컸는지, 또 효과적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 전망을 철저히 평가하기 전에 금리를 또 인상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이겠죠.
Fed가 5월 FOMC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번엔 금리를 동결할 거란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한 긴축도 중요하지만, 곳곳에서 파산 소식이 들려오는 상황이니만큼 잠시 안정을 찾는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