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허핑턴포스트의 원고료 논란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제안입니다. 인지 자본주의에 대한 표층적 이해만으로 쓰여졌기에 개념 사용에 있어 매우 미숙합니다. 인지 자본주의와 디지털 노동에 대한 협애하고 부족한 이해만으로 기술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잘못된 개념 활용 사례가 있으면 제게 메일(dangun76@gmail.com)을 주시기 바랍니다. 즉각 정정하거나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이 없는 관계로 메일로 대신함을 양해바랍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출범에 즈음해 원고료 미지급 논란이 국내에서도 불거졌다. 일부 논자는 이를 착취라고 비판하고 다른 논자는 “자발성을 착취로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아리아나 허핑턴은 “디지털 생리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며 논쟁 자체를 폄하한다. 시민저널리즘의 탄탄한 토대와 경험 위에서 새로운 디지털 저널리즘의 질서를 갈망하고 있는 한국 미디어 생태계에 던진 메시지 치고는 격이 너무 낮다.
허핑턴포스트가 그간 디지털 미디어 전반에 기여한 공을 결코 평가절하할 의도는 없다. 디지털 뉴스 미디어로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아왔던 허핑턴포스트는 전 세계 언론의 미래 모델로 충분히 가치를 인정 받아왔다. 나 또한 허핑턴포스트의 혁신 행보를 주목해왔고 이를 귀감 사례로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다.
그렇다고 허핑턴포스트의 성장이 기생적 착취에 의존해 성장해왔다는 사실 자체까지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특히 원고료 미지급 정책이 지닌 착취의 성격을 혁신과 저널리즘 기여로 희석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다. 허핑턴포스트의 비즈니스 모델이 어떤 착취 형태에 의존하고 있는지 파스퀴넬리의 프레임을 통해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이 글을 쓴 목적이다.
허핑턴포스트의 수익 모델
왜 착취인가를 논의하기 이전에 먼저 허핑턴포스트의 비즈니스 모델부터 살펴보자. 허핑턴포스트는 디지털 뉴스 미디어의 보편적인 수익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Traffic의 대규모 포획을 통한 광고 수익. 광고는 구글 애드센스류의 CPC, CPM 형태의 네트워크 광고와 최근 들어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네이티브 광고, Huff Live의 영상 CPC 광고 전체 수익의 골격이다. 허핑턴포스트는 네이티브 광고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Huff post Partner’를 설치했으며, 이곳에 소속된 광고 판매 담당자들은 브랜드(광고주)에 맞춤화된 콘텐트 생산에 복무하게 된다.
AOL 합병 이후 개별적인 수익 자료는 현재 발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하자. 비교적 최근까지 허핑턴포스트는 흑자 전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광고 플랫폼으로서의 매력도와 가치는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광고가 게시되는 디지털 뉴스 미디어로서 매력은 GM 캐딜락 광고 본부장인 Craig Bierly의 발언 속에 적지 않은 부분이 함축돼있다.
“아리아나 허핑턴는 우리가 원하는 오디언스와 만나게 해준다. 부유하면서 고학력이고, 알려진 오디언스. 그녀는 그런 오디언스를 갖고 있다.”
성격 1: [기술적 기생] 구글과 페이스북 알고리즘에 편입된 또다른 기생 장치
필자는 허핑턴포스트를 구글과 페이스북이 구축한 가치 포획의 메커니즘 속에 편입된 2차적 기생 장치로 바라본다. 1차적 기생체가 구글과 페이스북이라면, 이들 플랫폼에 기생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허핑턴포스트, 혹은 기타 바이럴 미디어 등은 2차적 기생 장치에 해당된다.
허핑턴포스트의 착취 여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기생체로서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허핑턴포스트는 2가지의 기생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그 첫번째는 기술적 기생이며 두번째는 지적 기생이다. 두 가지 기생 방식은 네트워크 공간 내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단기간에 더 많은 주목 효과를 흡수함으로써 이를 화폐적 가치로 전환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의 트래픽을 수취해 더 높은 화폐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두 가지 기생 테크닉이 지향하는 바라고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기술적 기생은 알고리즘 최적화로 표현되는 1차 기생 장치로의 기술적 편입을 의미한다. 허핑턴포스트의 성장 이면에 링크 위계 공식(페이지랭크와 엣지 랭크)에 편승한 기술적 기생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앞선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 Peretti가 제공한 탁월한 주목 포획 기계(Attetion Apparatus Machine)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의 위상을 확보하는데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파스퀴넬리가 설명하고 있듯1, 스펙터클 체제에서 상품의 가치는 매스미디어와 광고에 의해 추동된 관심의 응축과 욕망에 의해 주로 생산되는데, 그 상품 가치의 확장을 위해 허핑턴포스트는 부단히 주목의 획득을 위해 다양한 기술적 접근을 시도한 뉴스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허핑턴포스트의 관심 포획은 인지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경쟁과 도전의 과정이었으며, 이를 통한 확보된 주목 가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화폐 가치로 변형돼왔다. 이것이 허핑턴포스트의 핵심 수익모델인 광고 수익이다.
성격2 : [지적 기생] 인지 착취의 하이브리드 플랫폼으로서의 허프
일반적으로 디지털 뉴스 미디어의 잉여 가치는 내부 기자 노동자의 기사 생산이라는 착취 메커니즘에 의존한다. 고숙련된 기자 노동자의 고품질 기사를 인터넷 공간에 게시해 관심(Attention)을 수집하고, 주목경제 속으로 ‘자발적으로’ 편입(구글 SEO, 포털 검색 노출)함으로써 잉여 가치를 획득한다. 살아있는 고용자 노동의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구조이다.
허핑턴포스트는 페이스북류의 모델로 한 단계 진화한 모델이다. 하이브리드 착취 플랫폼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내부 기자의 착취 구조에 외부 기고자의 착취 구조를 덧입힌다. 전자가 이윤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인지 지대의 축적을 위한 장치이다. 허핑턴포스트는 외부 기고자에게 플랫폼(블로그)의 자유로운 활용과 기고를 보장한다. 플랫폼을 무상으로 대여하는 데 대한 대가로 인지 노동을 독려하며 그에 따른 보상체계로서 주목 가치(attention value)를 교환한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기생 시스템이 움직인다.
‘자발적 기고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들에게는 원고료라는 디지털 노동에 대칭되는 어떤 물적 가치도 제공되지 않는다. 허핑턴포스트는 그들이 제공해줄 ‘주목 가치’의 위대함을 설파함으로써, 자발적 동인을 자극한다. “쓰기 싫으면 쓰지 않아도 된다”는 허핑턴의 발언 뒤에는 허핑턴포스트가 가져다줄 ‘주목 가치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감이 숨어있다.
자발적 기고자(명망있는 블로거)의 디지털 노동은 주목 가치를 긁어들임으로써 광고 수익이라는 화폐 가치와 교환된다. 허핑턴포스트는 플랫폼을 대여하고 자발적 기고라는 원고 생산을 독려하면서 주목의 증대와 확산을 꾀한다. 명망있는 블로거의 지적 생산물에 기생함으로써 화폐 가치의 획득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파스퀴넬리는 인지 헤게모니(Cognitive hegemony)라는 모델을 제시하는데, 이를 설명하기 이해 인지 지대 개념을 끌어들인다. 인지 지대(Cognitive Rent)는 고전적 지대의 개념을 네트워크 공유지로 확장한 것으로, 공유지의 배타적 소유를 통해 창출하는 기생적 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 지대는 고전적 지대와 달리 화폐의 형식이 아닌 비트화된 비물적 형태(온라인 블로그 포스트 등)를 띤다. 이러한 인지 지대를 허핑턴포스트라는 플랫폼에 적용한다면, 기고자의 디지털 무료 노동은 ‘글로벌 트래픽 폭탄’이라는 관심에 대한 인지 지대이면서 동시에 플랫폼 이용에 대한 인지 지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인지 지대란 명백하게 자유롭게 개방된 집단지성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 환경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한다.1 허핑턴포스트가 인지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해 개방된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활용, 기고자의 자발적 디지털 노동이라는 인지 지대을 포획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닌 착취적 성격을 망각케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면서.
따라서 허핑턴포스트라는 플랫폼은 백욱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산과정에서의 기계잉여장치와 살아있는 고용자 노동의 결합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 이 두 가지의 형태로 작동하는 축적의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2 이윤과 인지 지대 축적을 위한 하이브리드 모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발적 생산의 동인은?
왜 허핑턴포스트의 블로거들은 자발적 생산(무료 원고 생산 노동)에 참여하게 될까. 이는 산업자본주의 파생물인 ‘관계의 단절’, ‘소외’, ‘연결성의 파편화’와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의 결과물인 도시화와 원자화된 개인은, 구체제 내 공동체로의 복원이라는 향수를 낳았고, 관심의 증대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욕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 플랫폼은 산업자본주의로부터 양산된 이들 욕망을 네트워크 플랫폼과 결합시켜 자본 축적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미디어 플랫폼은 네트워크라는 새롭게 부상한 형식 속에서 ‘관계의 연결 및 복원’과 ‘관심의 증대’라는 혁신적인 보상적 ‘인지 재화’를 제공함으로써, 자발적 착취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대신, ‘자발적 기고’ 혹은 ‘자발적 디지털 노동’이 착취라는 인식을 은폐시킨다. 즉, 이들 플랫폼은 인간의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 없이 자극함으로써 기계적 착취의 메커니즘으로 자발적으로 편입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하는 블로거들, 특히 명망 있는 블로거들도 여전히 관심의 부재 속에서 갈등하며 고민한다. 이들은 그렇지 않은 블로거들에 비해 더 스펙터클한 주목을 기대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명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허핑턴포스트는 글로벌 뉴스 플랫폼으로서 전세계적 ‘주목’을 차별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이점을 무기 삼아 자발적 노동을 더욱 채근한다.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말라”는 아라아나 허핑턴의 자신감 속에는3 네트워크 권력 및 통제자로서의 권위와 착취 구조의 정당화 로직이 한껏 묻어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기생체의 숙명이며 생존 방식이다. 기생은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은밀한 방식으로 잉여를 빨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4
결론
페이지랭크와 엣지 랭크라는 ‘공통 지성에 의해 생산된 가치를 포획하는 기식 장치’에 의존해 또다른 기생적 이윤과 지대를 창출하고 있는 허핑턴포스트에 원고료 논란을 제기하는 건 그만큼 한국 사회가 디지털 메커니즘에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지 무지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획된 가치를 최소한 재분배(애드센스 수익 배분)하는 구글, 오마이뉴스보다 허핑턴포스트는 한 단계 더 ‘악한’ 플랫폼이며, 그러한 ‘악한’ 플랫폼 속에서 여전히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한계점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 아닐까.
허핑턴포스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 플랫폼의 가치 생산 메커니즘에서 착취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은 디지털주의적5 접근일 수밖에 없다. 디지털 노동의 신 착취 구조 속에서도 한국 미디어가 잃어버린 ‘저널리즘의 가치’를 구원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허핑턴포스트 코리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 한국 사회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착취의 부정이 아니라 무너진 가치의 복원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글 쓰면서 알게 된 책
- Trebor Scholz.(2011). ‘Digital Labor’
Playbor(Play + Labor)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