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가 고금리와 중동 전쟁, 채권시장 불안에도 상승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던 핵심 근거는 기업들의 이익 증가였습니다. 금융정보업체 팩트셋에 따르면 S&P500 기업들의 3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약 3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미 실적을 발표한 기업의 실제 수치와 아직 발표하지 않은 기업의 전망치를 합산한 결과입니다.
기업이익이 이처럼 빠르게 증가한다면 주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도 일정한 근거가 생깁니다.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수록 같은 주가에서 투자자가 지불하는 이익 대비 가격은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올해 미국 기업들의 이익 전망치는 크게 높아졌지만 주가는 상대적으로 덜 상승하면서, 이익 대비 주가 수준은 연초보다 낮아졌습니다.
WSJ
하지만 이익 증가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다우존스마켓데이터의 분석에 따르면 S&P500 기업들의 3분기 이익 증가분 가운데 엔비디아와 마이크론 두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4%에 달합니다. 브로드컴과 메타플랫폼스 등을 포함한 상위 10개 기업은 전체 증가분의 약 3분의 2를 만들어냅니다. 미국 증시 전체의 실적 호황처럼 보이는 현상이 실제로는 소수 기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겁니다.
🤖 엔비디아와 마이크론이 만든 이익 폭발
엔비디아와 마이크론의 실적을 끌어올린 것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 수요입니다. 세계 각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AI 모델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면서 고성능 연산용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공급이 빠르게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반도체 제조업체들의 가격 결정력도 높아졌습니다.
실적 증가 폭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마이크론이 지난달 발표한 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078% 증가했습니다. 1년 사이 이익이 10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팩트셋에 따르면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의 3분기 순이익도 전년 동기보다 약 90%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실제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AI 산업의 수익이 어디에서 먼저 발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를 공급하는 기업들은 이미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AI 산업의 최종 수익성이 검증되기 전부터 인프라 공급업체들이 먼저 돈을 버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 고유가 수혜 기업도 한몫
미국 기업이익 증가에 기여한 기업이 모두 AI 관련 기업인 것은 아닙니다. 상위 10개 기업에는 엑손모빌과 마라톤페트롤리엄, 셰브런, 발레로에너지 등 에너지 기업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란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서 석유·가스 기업들의 수익성이 개선된 결과입니다.
이는 미국 증시의 이익 증가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요인에 의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따른 반도체와 기술기업의 이익 증가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학적 갈등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입니다. 전자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가, 후자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기업이익을 끌어올리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두 요인 모두 지속성을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AI 투자는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와 기술 수요에 영향을 받고, 에너지 기업의 이익은 국제유가와 정제마진 등의 변화에 민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높은 이익 증가율이 장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익 증가율 자체만큼이나 어떤 기업이 어떤 이유로 돈을 벌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 상위 10개 기업을 빼도 좋은 상황
그렇다고 미국 기업들의 실적 호황을 모두 소수 기업이 만들어낸 착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상위 10개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S&P500 기업들의 3분기 순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약 1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AI와 에너지 관련 일부 대형 기업을 제외하더라도 기업이익 전반이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MAI캐피털매니지먼트의 크리스 그리산티 수석 시장전략가는 이를 올스타팀에 비유했습니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지만, 나머지 선수들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증시의 강세장이 4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머지 기업들의 10% 이익 증가율도 결코 낮은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입니다.
또 다른 긍정적인 신호는 주가가 기업이익 전망치만큼 빠르게 오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업이익 예상치가 크게 상향되는 동안 주가 상승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어서 밸류에이션 부담이 일부 완화됐습니다. 그리산티는 시장이 예상보다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과도한 도취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습니다. 기업이익 증가가 소수 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미국 증시 전체가 거품이라는 뜻은 아닌 셈입니다.
🏗️ AI 투자 열풍의 가장 큰 위험은 '수익성'
그럼에도 시장의 근본적인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AI 인프라 투자는 앞으로 AI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를 통해 기업들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기업들의 현재 이익은 이러한 기대가 실제 설비투자로 이어지면서 발생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데이터센터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최종적으로 충분한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기업들이 AI 인프라에 수조달러를 투자했는데 실제 AI 서비스의 매출과 이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추가 투자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도체 주문이 감소하고, 현재 높은 이익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들의 성장 속도도 둔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랜 경력의 시장 분석가 에드 야데니는 이런 우려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습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 건설한 데이터센터들이 결국 피클볼 경기장으로 개조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비유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AI 인프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그 인프라를 활용해 장기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이익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 메타의 자금 조달 계획에 나스닥이 흔들린 이유
이러한 불안은 최근 금융시장에서 다시 표면화됐습니다. 메타플랫폼스가 AI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하려는 계획을 내놓자 투자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여파로 나스닥지수는 올해 들어 가장 큰 폭의 하락세 가운데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AI 기업들의 투자 확대가 언제나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동안 투자자들은 빅테크 기업들이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AI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투자 규모가 계속 커지면서 외부 자금 조달의 필요성과 차입 비용에 대한 우려도 함께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금리가 상승하는 환경에서는 대규모 설비투자를 위해 조달한 자금의 비용이 커질 수 있습니다.
시장이 우려하는 것은 AI 투자가 갑자기 중단되는 상황만이 아닙니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지연되거나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지는 것만으로도 향후 반도체 수요와 기업이익 전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AI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현재의 실적뿐 아니라 미래 투자 계획의 지속 가능성에도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월가의 눈은 전력으로
일부 투자자들은 AI 투자 확대의 수혜를 누릴 다음 산업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리산티가 속한 운용팀도 반도체와 같은 이른바 '곡괭이와 삽' 관련 투자 비중을 조정하고 전력 공급 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진행될수록 전력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반도체 산업은 공급 부족이 완화되면 가격 상승세가 둔화될 수 있습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는 공급능력 확대에 따라 가격과 수익성이 달라질 수 있는 산업입니다. 반면 이미 건설된 데이터센터는 가동을 지속하는 동안 전력을 소비합니다. 데이터센터가 실제로 활용되고 가동률이 유지된다면 전력 수요는 장기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AI 투자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지점이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는 초기에는 반도체와 서버, 건설 관련 기업들이 수혜를 입습니다. 이후 시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전력과 냉각, 유지관리 등 운영에 필요한 산업의 중요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AI 인프라의 건설 단계에서 운영 단계로 투자자들의 관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닷컴버블과 비슷하지만...
AI 투자 열풍은 종종 1990년대 말 닷컴버블과 비교됩니다. 당시에도 인터넷이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기대가 주가를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면서 기술주가 급락했고,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AI 역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낙관론과 막대한 자금 유입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레이먼드제임스의 래리 애덤 최고투자책임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2000년 전후의 닷컴기업들은 지금의 AI 관련 대기업들만큼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엔비디아와 마이크론 등은 실제로 높은 이익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빅테크 기업들도 상당한 매출과 현금창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AI 관련 주식의 가치가 모두 근거 없는 기대에만 기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이익이 높다는 사실이 미래의 성장률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반도체 공급 부족이 완화되고 AI 인프라 투자 증가세가 둔화되면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실적 증가율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닷컴버블과의 차이는 실제 이익이 존재한다는 점이지만, 그 이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검증해야 할 문제입니다.
🔍 미국 증시의 다음 시험대는 이익의 확산
미국 증시의 강세를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S&P500 전체의 이익 증가율만이 아닙니다. 어떤 기업들이 이익 증가를 주도하고 있는지, 그 성장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 그리고 다른 산업으로 확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현재는 엔비디아와 마이크론을 비롯한 일부 기업이 이익 증가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AI 기술이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고 다양한 기업의 매출과 이익을 개선한다면 미국 증시의 성장 기반은 더욱 넓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AI 인프라 투자만 빠르게 증가하고 이를 활용한 서비스의 수익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금의 이익 집중 구조는 시장의 취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반도체에서 전력 등 다른 산업으로 관심을 옮기는 것도 이런 변화를 염두에 둔 움직임입니다.
결국 월가가 확인해야 할 것은 AI 관련 기업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가를 넘어, AI 투자가 미국 경제 전반에 얼마나 폭넓은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입니다. 지금 미국 증시의 호황은 소수 기업의 폭발적인 이익 증가가 떠받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강세장이 더 단단해지려면 그 성장의 과실이 더 많은 기업으로 확산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