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의 여운이 진하다. 화려한 미슐랭 스타 셰프들과 재야의 고수들이 펼치는 요리 대결은 그 자체로 도파민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 포착된 것은 화려한 요리 기술이나 넷플릭스의 거대 자본만이 아니었다. 그 뜨거운 주방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권위'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권위'라고 하면 나이와 연차, 직급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경직된 위계질서를 떠올린다. 이른바 '꼰대 문화'다. 하지만 <흑백요리사>의 주방은 이 낡은 공식이 철저히 파괴된 참신한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가 있다.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라는 엄청난 간판을 가졌지만, 그는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다. 아버지뻘 되는 대선배 요리사 앞에서도, 띠동갑도 넘는 후배 앞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정중하다. 맛에 대한 평가는 칼날처럼 예리하고 단호하지만, 그 태도에는 상대를 향한 깊은 존중이 배어있다. "내 말이 곧 법"이라며 호통치는 과거의 리더십이 아니라, 오직 실력과 논리로 설득하는 그의 모습은 '권위의 실종 시대'에 젊은 세대가 어떤 리더를 원하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롤모델이다.
이러한 '새로운 권위'는 심사석에만 있지 않았다. 백수저(유명 셰프)로 출연한 시니어 셰프들의 모습도 무척 놀라웠다.
한식 대가 임성근 셰프를 보자. 그는 흑수저 셰프 '윤주모'와 팀을 이뤘을 때, 자신의 경력을 앞세워 지시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을 뛰어다녔고, 오직 최상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그에게서 느낀 것은 권위적인 선배의 압박감이 아니라, 요리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장인의 순수한 열정이었다.
중식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최고령 출연자 후덕죽 셰프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요리 인생 57년 차, 이미 모든 것을 이룬 대가임에도 그는 연속된 '무한 요리지옥' 도전에서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며 눈을 반짝였다. 현장 요리 인생 60년을 채우는 게 목표라는 그의 고백 앞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대접받으려 하지 않고, 여전히 현역으로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은 '진짜 어른'의 품격이 무엇인지 웅변한다.
젊은 리더십의 표본을 보여준 손종원 셰프도 빼놓을 수 없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을 두 곳이나 이끄는 헤드 셰프지만, 팀전에서는 기꺼이 막내 역할을 자처하며 뛰어다녔다. 특히 '요리괴물' 셰프와 팀을 이뤄 진행하던 중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그가 던진 말은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의 역할은 솔루션을 찾아내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남 탓을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오직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현대 조직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정수가 아닐까.
<흑백요리사>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비결은 단순히 '맛있는 요리'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곳에는 실력 있는 자가 존중받고, 나이 든 자가 솔선수범하며, 리더가 책임을 지는 '이상적인 생태계'의 모습이 스토리텔링에 그치지 않고 실행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세대 갈등과 권위주의에 대한 피로감이 계속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속 주요 인물들이 증명했다. 권위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과 태도로 증명될 때 비로소 빛난다는 것을. 특히 우승을 거머쥔 쉐프는 "나는 고단한 주방에서 요리하는 수많은 사람중에 한 명일 뿐"이라며 몸을 낮추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꼰대가 사라진 주방, 그 치열했던 승부의 현장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진짜 권위는, 그리고 진짜 어른은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실력으로, 그리고 태도로 보여줄 뿐이다.
미디어와 비즈니스, AI 등을 다루는 구독 기반의 경제 미디어 더코어(The Core)의 대표이자 스타트업 BluedotAI의 공동 창립자이다. 고려대 미디어대학원에서 ‘AI와 저널리즘’을 강의하는 겸임교수로도 활동중이다.
이전에는 Neo Touchpoint를 창업했었고 창업 전에는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에서 12년간 전략기획 및 동영상 서비스 업무를 담당했다.
KBS 이사(2018~2021)를 역임했고 현재 한겨레신문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유튜브 트렌드’와 ‘디지털 미디어 인사이트’ 등 6권의 저서를 단독 혹은 공동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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