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기 마련이죠. 현직 언론사 기자나 연구자나 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은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니 생각은 뭔데?‘라며 되받아치기 바쁘죠.
저는 비교적 이 질문을 자주 던지고 고민하는 편이었습니다. 관련한 문헌이 있으면 얼른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긴 연재물을 만들어 미디어고토사에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은 ‘저널리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드리기 위해 미국 오레건대 세스 르위스(Seth C. Lewis) 교수의 논문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원래 이 논문은 ’국제 저널리즘연구 백과사전’의 ‘저널리즘‘ 키워드를 구성하는 연구물입니다. 영문으로는 약 7페이지에 달합니다. 추가 읽을거리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저널리즘의 정의 논쟁과 역사를 들여다보는데 무척이나 유용합니다.
본격 논의에 앞서 저널리즘 정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Schudson의 정의부터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저널리즘은 공적으로 중요하거나 관심사가 되는 현재의 일들을 규칙적으로 생산하고 배포하는 사업 또는 행위다. 저널리즘은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논평을 널리 퍼져 있는 익명의 수용자들에게 정기적으로(보통 하루단위이지만 온라인에서는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된다)알리는 일련의 제도들이다. 저널리즘에서 다루는 정보와 논평은 또한 보통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제시되고 담론의 공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담론 내에 수용자를 공적 주체로 포함시킨다."(마이클 셔드슨. (2011/2014). 뉴스의 사회학. 한국언론진흥재단. p.15.)
기억할 개념으로서 ‘해석적 커뮤니티’
제가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곧장 주문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비 젤리저의 ‘왜 저널리즘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나’입니다. 원제는 ‘Taking Journalism Seriously’ 직역하자면 ‘저널리즘 진지하게 여기기’ 정도랄까요. 르위스 교수는 바비 젤리저의 이 책을 꼼꼼하고 비중있게 다룹니다. 특히 저널리스트와 학자 사이의 저널리즘 정의가 다르게 형성된 이유 혹은 배경을 설명할 때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도 했습니다.
바비 젤리저의 저서에서 저널리즘의 정의와 관련해 기억해 둘 개념이 하나 있었습니다. ‘해석적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ies)입니다. 주어진 현상을 둘러싼 지식의 경계를 결정하는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기자와 저널리즘 학자의 저널리즘 정의가 다르게 형성되는 것도 이 개념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바비 젤리저는 다음과 같은 기자와 학자가 저널리즘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을 이야기하는 방식과 내용의 차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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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집단 | 학자 집단 |
뉴스를 담고 있는 컨테이너 | 전문가로서 저널리즘 |
현실의 필터링 되지 않은 거울 | 제도로서 저널리즘 |
양육받고 관리받아야 할 어린아이 | 텍스트로서 저널리즘 |
공익과 연결된 서비스 | 사람으로서 저널리즘 |
일련의 관행으로서 저널리즘 |
결국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가 통합되지 못하고 연구자와 기자 사이에 간극이 커지는 것, 나아가 통합된 정의로 도출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의 행위 자체가 외면받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이 논문은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읽어보길 권합니다
(1) 언론사 뉴스룸의 리더들 : 얼마전 김의겸 의원의 ‘경찰 사칭 취재 일반적’ 발언이 논란이 됐었죠. 아마 자신은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했는가를 가늠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말이죠. 저널리스트가 전문직으로서 윤리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혹은 직업 이데올로기로서 저널리즘이 안착해 가는 과정에서, ‘경찰 사칭’을 통한 취재 행위가 용인되는 때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근 불거진 보도태도의 문제를 합리화하는 용도로 동원돼서는 안된다는 사실, 특히 저널리즘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기자 출신 국회의원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마 그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뉴스룸의 리더들에게 이 논문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의외로 이 집단들 사이에서 저널리즘 정의에 대한 답변을 더듬대지 않고 설명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입니다. 김의겸 의원과 동일한 사고를 공유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과거 그들에게 용인됐던 저널리즘의 윤리적 기준은 상대적으로 느슨했고, 저널리즘의 정의 속에 포함됐던 기능들은 ‘권력 감시’ 이외에 특별하게 강조된 것이 없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그룹이 저널리즘 정의에 더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건강한 뉴스룸이 구축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얕은 저널리즘에 대한 지식은 저널리즘과 무관한 행위, 즉 공공적 가치가 부재하고 진실성과 거리가 있으며,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보도를 양산하는 결과로 항상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포털 뉴스와의 관계와 관련해서 말이죠.
(2) 포털 뉴스 관련 알고리즘 개발자들 : 최근 들어 뉴스 관련 서비스에 관여하는 알고리즘 개발자들도 저널리즘의 정의에 대해 좀더 친숙해 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회나 정부로부터 가해지고 있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력한 압박은 뉴스 서비스 중단이나 저널리즘을 존중하는 알고리즘의 개발을 강제하고 있죠. 하지만 알고리즘 설계자로서 개발자들이 저널리즘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낮다면, 무엇을 목표로 설정하고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며, 무엇을 학습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도출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뉴스 서비스 관련 알고리즘 개발자는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질의에 일정 수준 이상은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칙으로 보자면, 저널리즘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묻는 국회 관계자들 중에 ‘저널리즘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포털이라는 조직 안에서도 아마 이 정의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결론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기자나 기자 출신들 또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이 근본적 질문을 개발자 스스로가 이해할 필요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 정의가 확장돼야 하는 이유
세스 르위스 교수는 저널리즘의 정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면서 저널리즘의 정의가 확장돼야 하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적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널리즘의 정의가 물리적 매체나 유통을 방식을 포함시켜왔던 1800년대의 경험을 되살려, 새로운 저널리즘의 생산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비인간 인공물의 역할을 저널리즘의 정의가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저널리즘으로 간주되는 것을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의 주체가 누구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저널리즘의 정의는 응답해야 한다는 주문이었죠.
이처럼 저널리즘의 정의는 여러 요인들에 의해 또 ‘해석적 커뮤니티’에 의해 다르게 형성되고 제시돼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심/주변부로 이격/분화되고 있는 저널리즘 정의를 다시금 통합의 공간으로 불러올 수 있는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저널리즘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저 학계의 연구 대상물로만 남겨둘 것은 아니라는 거죠. 기자들이 더 자주 묻고 답변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새로운 주체로서 알고리즘 설계자들도 이 토론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요.
이 논문이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작은 발제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