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가 경제학 서적에 나오는 이유는?
로빈슨 크루소가 경제학 서적에 나오는 이유는?

대니얼 디포가 발매한 1719년 소설 <로빈슨 크루소>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79일간 표류한 끝에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는데요.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온갖 경제 이론의 예시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즈의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등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 경제학 서적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예시에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죠.

이런 이유로 로빈슨 크루소는 <뉴 팔그레이브 경제학 사전>에도 등재됐습니다. 해당 사전은 3000여개에 달하는 경제학 용어를 수록했는데, 로빈슨 크루소가 그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사전에선 로빈슨 크루소를 "19세기 말, 수요-공급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크루소 경제가 많이 언급됐다. 크루소는 현재 또는 미래의 최대 효용을 얻기 위해 가용한 자원을 할당하는 합리적인 경제 주체의 대표다."라고 설명하네요.

사전에서 설명하듯이 로빈슨 크루소의 최대 장점은 생존력, 다시 말해 ▲혼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가장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장점 속에 그가 경제 이론의 사례로 자주 동원되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 로빈슨 크루소와 경제학의 관계를 소개한 글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요(이코노미스트, 한경, 월간중앙, KDI 등). 이 글에선 해당 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를 짧게 소개하고, 이를 통해 왜 로빈슨 크루소가 경제학 서적의 단골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본 가정

예시 속 로빈슨 크루소가 처한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무인도 거주: 경제 주체는 한 명, 크루소뿐입니다. 모든 생산과 소비도 크루소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 외부와 연락 불가: 교류가 불가능하니 당연히 거래도 불가능합니다.
  • 목표는 생존: 크루소는 최대한 오래, 그리고 잘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코코넛 채집 등) ⓑ 에너지 충전을 위한 여가 활동(수면, 청결관리 등)

여기에 추가 가정으로 한 명 정도 크루소의 거래 파트너('맨 프라이데이'란 이름의 하인, 혹은 친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크루소의 생산물(코코넛 등)이 즉시 썩어버리는지, 며칠 정도 보관 가능한지 정도를 추가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 가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1인 경제의 확장: 합의된 유연성 필요

  •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갑니다. 아마도 먹을 코코넛을 채집하거나 누워서 체력을 충전하는 일이 일과의 전부일 텐데요. 따라서 그는 하루 24시간 중 코코넛 채집에 몇 시간을 쓸지, 휴식을 취하는 데 몇 시간을 쓸지 정해야 합니다.
  • 코코넛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크루소이기 때문에 무인도에선 과수요도 과잉 생산도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코코넛을 채집하면 됩니다. 케인스에 따르면 1930년대 대공황은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소비와 수요가 감소하는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크루소의 무인도에선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1인 경제에서 크루소는 '자신의 효용'만 고려하면 되기에 가장 조화로운 최적의 균형 상태에 다다르기 쉽습니다. 이해 관계가 다른 타인의 입맛에 맞출 필요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게 곧 최적의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서로 교류하는 현실에서 크루소의 1인 경제는 '가격의 유연함'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200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엘 맥패든(Daniel McFadden)은 '로빈슨 크루소가 발라스와 케인즈를 만났을 때'라는 논문에서 크루소를 사용해 해당 교훈을 선사했는데요.

여기선 1인 경제를 다인 경제로 확장하고자 크루소의 고용주 '맨 프라이데이'를 추가로 등장시켰습니다. 이제 크루소는 1인 경제에서 벗어나 프라이데이에게서 코코넛을 급여로 받는 신세가 됐는데요. 따라서 '급여로 코코넛을 얼마나 주느냐'가 프라이데이와 크루소의 효용을 결정합니다. 코코넛을 너무 많이 줘야 하면 프라이데이는 굳이 크루소를 고용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의 일만 시키려 할 테고, 코코넛을 너무 적게 주면 크루소는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해서 여가를 즐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데이와 크루소는 급여가 되는 코코넛의 양을 합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코코넛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크루소의 컨디션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최적의 코코넛 양인지도 매번 달라집니다. 처음엔 최적이라 판단됐던 코코넛 양도 시간이 흐르면 프라이데이와 크루소간 불균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맥페든 교수는 유연하게 급여와 가격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를 단순히 '쉬운 해고, 쉬운 고용, 쉬운 급여 삭감이 답'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데요. 이 가정의 목적은 "고용주(프라이데이)와 피고용인(크루소)가 모두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며 핵심은 "상호 합의"입니다.

행태경제학 속 모호함

  • 로빈슨 크루소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인도 표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일종의 재무상태표를 작성합니다. 종이의 왼쪽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좋은 점을, 오른쪽엔 나쁜 점을 나열한 건데요.
대략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쭉 나열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무인도에 떠밀려온 순간부터 좋은 점이란 게 존재하긴 어렵습니다. 제가 임의로 작성해본 위 표를 봐도 나쁜 점은 누가 봐도(절대적으로) 부정적입니다. 반면 좋은 점은 무인도에 표류하고 있지 않은 우리가 보기엔 과연 '좋은 점'이라고 꼽을 수 있나 싶습니다. '인간은 주어진 정보를 모두 고려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고전, 주류 경제학의 전제에 따르면 크루소가 '좋은 점'이라고 적었던 내용은 모두 절대적인 좋고 나쁨의 기준에 따라 '나쁜 점'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태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애매하게 합리적입니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대충 차트만 보고 주식 투자를 하는 경우, 배송비 4000원을 줄이기 위해 억지로 무료 배송 기준을 넘기려 과소비를 하는 경우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에서 인간은 엄청나게 많은 '비합리적' 행동을 하는 존재임에도,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걸 당연한 명제로 삼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학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낡은 이론'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크루소 역시 절대적인 기준을 따라 무인도 생활의 나쁜 점에 좌절하고, 고전 경제학의 명제(인간은 늘 합리적)을 따라 계속 탈출 시도만 했다면 28년의 표류를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크루소는 "무인도에서의 삶이 오히려 도시에서의 삶보다 행복할 것"이란 비합리적 가정을 합니다. 탈출 확률이 아무리 작더라도, 조국에 가도록 탈출을 시도할 때 효용의 기댓값이 무인도에서 평생 여러 위험에 시달리며 살 때 얻을 효용의 기댓값보다 클 텐데 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위 같은 선택은 '전망 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의 효용이 계산되는 과정에는 절대적인 소득이나 타인과의 비교는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범위까지 포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크루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크게 ⓐ '무인도에서 잘 살아 남아본다' ⓑ '죽거나 더 나쁜 섬으로 떠밀려 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2개였기에 크루소는 ⓐ를 골랐고, 그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덕분에 크루소는 나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즉,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과 합리성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애초에 로빈슨 크루소는 비합리적인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소설 속 로빈 크루소의 모험은 그가 노예 거래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크루소는 4000파운드의 미래 가치를 지닌 담배 농장을 두고 모험을 떠났는데요. 데이비드 스필맨(David Spielman)의 경제사 연구에 따르면 4000파운드는 크루소를 당시 영국 내 상위 5% 이내 부유층에 들게 해줄 정도의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부를 두고 생존률이 매우 낮은 모험을 떠났단 것에서 크루소의 비합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야성적 충동'을 가졌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야성적 충동'은 (이 글의 첫 문단에서 언급한)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등장한 용어로, '경제 주체를 움직이는 비이성적인 심리적 요인'을 뜻합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역시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처음 사용됐단 겁니다.

아무튼 로빈슨 크루소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사이에서 홀로 생산과 소비를 통해 1인 경제를 꾸렸단 매력 덕에 수백 년 동안 경제학 서적을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로빈슨 크루소> 혹은 여러 경제학 서적을 읽으시며 로빈슨 크루소와 경제학의 관계를 천천히 짚어보는 건 어떨까요?


[요약] 로빈슨 크루소, 경제학의 상징적 인물로 거듭나다

왜 중요하냐면:
1719년에 출간된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모험 이야기를 넘어, 수세기 동안 다양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며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이 처한 황량한 섬에서 생존과 자원 배분 문제를 해결하며 '1인 경제'를 운영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등 여러 경제학 서적에서 그의 예시가 언급되었습니다. 실제로 <뉴 팔그레이브 경제학 사전>에도 포함될 정도로 그의 행동은 현대 경제학에서 중요한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억해둘 것:
로빈슨 크루소가 보여준 생존력과 자원 할당 능력은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이 참조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 효용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주체로서, 개인과 시장 간 상호작용, 급여와 가격 유연성 등 다양한 경제 원칙을 설명하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비단 전문가들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며 경제 원리에 대해 좀 더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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