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동양철학 거장 이승환 교수는 주제토론을 이런 말로 시작했다.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의와 닮았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같은.” 조선의 서구과학 수용 과정을 두고 드러난 관련 학계의 견해 차이를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학부에선 천문학을 석박사에선 한국사를 전공했던 구만옥 경희대 교수는 서구의 근대적 관점에서 조선의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근대주의 관점에서 전통사회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선과 기획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구 교수는 시헌력과 향약이 100여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조선화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그 지난한 노력을 왜 100여년이나 해야 했을까, 그 부분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새 과학’의 등장 맥락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해’, 최한기의 ‘기륜설’ 등은 서양선교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해한 사례다. 이러한 조류로서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 과학’은 서양 과학기술과의 융합 속에서 등장한 독자적인 과학기술적 철학과 관점의 탄생을 함축한다는 얘기였다.
반면 김재영 박사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과학기술이라는 게 있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물론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접근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내 기술사학자들이 서양 과학을 하나의 단일한 구조, 논리로 단순화하려는 시각을 비판하는 쪽에 가까웠다. 서양 과학조차 하나로 종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철학들로 산재해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서구과학 서적들은 대부분 중국의 예수회사(jesusit)가 번역한 것으로 이들 서적을 조선 사대부가 재번역한 것일 뿐이었다는 논지다. 특별히 조선만의 과학기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문제제기였다.
조선 과학기술을 둘러싼 이러한 견해차, 혹은 갈등은 현재 실리콘밸리 IT 기술 수용을 둘러싼 대립적 논의에도 충분히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머지 않은 시간 안에 실리콘밸리발 기술을 놓고 ‘실리콘밸리 신식민지’ 혁신론과 ‘내재적’ 혁신론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듯싶다.
중화적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내재화했던 조선 사대부, 일본식 자본주의 근대화론을 통치 운영 철학으로 이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실리콘밸리적 기술 가치관을 혁신의 유일 경로로 퍼나르고 있는 국내 기술 엘리트.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 VS 내재적 발전론의 이항대립적 관점은 경계해야 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만큼 또 경계해야 할 점은 조선시대 노론 이데올로기의 반복처럼 느껴지는 실리콘밸리 대안론이다. 한 사회의 구성적 발전적 맥락을 배제하는 이러한 시각이 주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대립항이 등장하고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의 피해는 조선과 같은 강력한 ‘노론 이데올로기 사회’의 등장이며 사회적 유연성과 다양성은 그만큼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