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주말에만 쓰게 되는 물건이 있다. 인공지능 스피커다. 주말, 느긋한 마음이 되면 거실에 있는 ‘헤이 카카오’에게는 날씨도 묻고 뉴스와 음악도 청해 듣는다. 주방에 있는 ‘아리아’는 요리할 때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담당이다. 아직은 말도 잘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종종 해서 핀잔도 많이 받고 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요즘은 가끔 재치있는 대답도 한다. 주말이 끝난 월요일에는 그간 어색했던 ‘시리’와도 대화를 시도하지만 혼자 떠드는 게 어색해서 금세 안 쓰게 된다.
기계와 말을 해야 하는 어색함을 없애주는 서비스가 있다. 챗봇(Chatbot, Chatter robot)이다. 일상적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채팅로봇 프로그램을 뜻한다. 요즘 다양한 영역에서 챗봇서비스가 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 바로 고객 상담 영역이다. 전화하고 기다리고, 설명하는 과정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고객 상담을 해야 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챗봇 솔루션을 도입하고 있다. 직접 개발하기도 하지만 해피톡과 채널톡 등의 챗봇 솔루션을 빌려 쓰기도 한다. 이런 기능적 챗봇 외에, 최근 내가 만난 가장 신박한 챗봇이 있다. “당신의 부캐를 찾아 주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헬로우봇이란 챗봇이었다. 페이스북에서 가끔 성격 검사 등 재미요소를 가미해 입력을 유도하는 서비스는 많았는데, 응답 과정이 귀찮아서 중간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챗봇과 쌍방향적으로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끝까지 하게 되는 그런 서비스였다. 아마도 챗봇의 힘이 이런 것 같다.
투자 자문을 해주는 은행 챗봇도 있다. 은행마다 자체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토대로 고객의 투자 성향과 자산 규모, 연령대, 시장 상황을 분석해서 맞춤형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시해준다. 국민은행은 ‘케이봇샘(KBotSAM), 하나은행은 ’하이로보(HAI Robo), 우리은행은 ‘하이브리드 우리 로보-알파’ 등 로보어드바이저 챗봇을 운영하며 개인화된 투자 자문을 해주고 있다.
이처럼 챗봇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까닭은 자연어 처리(NLP, Natural Language Processing) 기술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비영리 인공지능 연구기업 OpenAI*가 2020년 공개한 인공지능 언어 생성 모델 ‘GPT-3(Generative Pre-Training 3)**같은 기술은 챗봇의 고객 응대 수준을 획기적으로 진보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 일론 머스크가 만들고, MS에서 10억을 투자한 비영리 연구 기업 .
** 1,750억개의 매개변수로 다수 언어 작업을 할 수 있는 거대 자연어 처리모델. 과제의 종류와 상관없이 적용 가능(task-agnostic)하며. 매우 적은 입력값으로 결과 확보 가능(minimum-tuning)한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챗봇이 잘 되지 않았던 이유는 자연어 처리 기술 자체의 한계도 있었지만 한국어 처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등 인공지능 연구 선진국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와 중국어로 챗봇에 대한 성공 사례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한국에서는 대중적 챗봇이 등장하지 못했다. 그나마 관심을 받았던 챗봇이 2018년 카카오가 내놓았던 프로야구 챗봇이다. 카카오가 챗봇을 개발하며서 프로야구를 택한 이유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으면서 영상과 뉴스, 팬 커뮤니티, 공식 기록 등 다양한 데이터가 많은 점 때문이다. 동시에 이용자의 질문이 대체로 예상가능한 경우가 많은 점도 장점이라고 한다. 카카오 프로야구봇은 지금까지도 잘 살아남아서 장수 챗봇이 되고 있다.
야구단을 운영하는 유명 게임사 NC소프트는 이용자와의 정서적 교감이 기술적 완성도만큼 중요하다고 보고, 프로야구 앱 ‘페이지(PAIGE)’ 챗봇에 정서적 교감을 극대화시킬 장치를 가미했다. 가령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설정해 놓으면 인공지능이 그에 맞는 ‘편파 해설’을 해주는 것이다. 이용자가 응원하는 팀 선수가 공을 쳤을 때는 “와~ 쭉 뻗어나갑니다” 식의 흥분한 톤의 해설이 나가고, 반대로 상대편 선수라면 “공을 쳤네요”라고 차분한 톤으로 해설을 하는 식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어 챗봇이 진일보한 것을 보여주는 소셜 챗봇이 등장했다. 인공지능 스타트업 스캐터랩이 만든 “이루다”라는 소셜 챗봇이다.
NC의 프로야구봇은 이용자가 미리 자신의 응원팀을 알려줘야 그에 맞게 호응을 해주지만 소셜 챗봇은 이용자에 대한 정보 없이 대화를 통해서 이용자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다. 그래서 선톡을 날리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자에 대한 이해를 확보한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이용자의 감정을 알아내고, 상황이나 맥락에 맞춰 응대를 하면서 이용자와 정서적 교감을 한다. 검색해보면 이루다가 얼마나 이용자와 교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화 캡쳐들이 정말 많다.
스캐터랩은 상대방과 나눈 카톡 대화를 제공하면, 그 대화를 분석해서 상대방이 당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판별해주는 ‘텍스트앳’이라는 서비스로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들에게 인공지능이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까지 판별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캐터랩은 이러한 서비스들을 통해 오픈 도메인 대화(특정 영역이 아닌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을 주제로 이뤄지는 대화) 데이터를 모아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영화 에서 처럼 이용자와 진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이처럼 인공지능 스피커가 음성, 챗봇이 텍스트를 통해 인공지능과 인간과 소통하려는 시도라면 삼성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람의 형상을 갖춘 인공 인간 ‘네온(NEON)’을 통해 고객과 소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온을 소개한 CES 2020에서 삼성은 “네온이 수백만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고 다양한 외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면서 “AI 비서와 인터페이스, 뮤직 플레이어 등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친구” 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미 Affectiva, BeyondVerbal 같은 회사들은 얼굴 분석, 음성 패턴 분석 등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해독하고 있기에 이러한 기술이 잘 결합된다면 가트너(Gartner) 부회장 아넷 짐머만 (Annette Zimmermann)이 얘기한대로 "가족이나 절친보다 내 감정 상태를 잘 알아치리는 개인 장치”를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 인간의 모습을 하고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아바타’인 네온은 삼성이 개발한 ‘코어 R3’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만들었다. 코어 R3는 ‘현실’(reality), ‘실시간’(real-time), ‘즉각 반응하는’(responsive) 등 3대 특징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아바타 배우를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챗봇의 기술 진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SF영화 같은 미래의 기술이라서가 아니라 고객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적 방송이나 영화처럼 고객은 있되 고객과 직접 소통할 통로가 없었던 사업자들은 이러한 챗봇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미국 방송사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2017년 아인슈타인의 삶을 그린 드라마를 홍보하기 위해 페이스북 챗봇 서비스를 내놓은 바 있다. 물론 이 챗봇은 정해진 질문에 대해 아인슈타인의 생전 대화에 근거한 정형적 대답을 하는 수준이었지만 꽤 인기를 끌었고 420만명의 팔로워를 확보했다. 그래서 2019년 피카소의 전기 드라마를 제작할 때도 챗봇을 만들었다.
만약 국내에서도 방송사와 영화사들이 새로운 콘텐츠를 런칭할 때 관련 정보를 잘 학습시킨 챗봇을 만들어서 서비스 해보면 어떨까? 새로운 정보와 인사이트를 팬들에게 제공하면서 실시간 방송 시청정보를 센스있게 알려주고, 나아가 취향에 맞춘 콘텐츠 추천까지 하는 챗봇이 있다면 많은 2030 세대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까?
최근 JTBC가 홍대 앞에 “JTBC play”라고 하는 복합문화공간을 열었다. TV 앞을 떠난 2030 세대에게 JTBC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팬덤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가 된다. 또 Z세대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온라인 셀렉트샵 29CM에 JTBC 브랜드 특별 전시도 함께 열었다. 다른 브랜드를 광고해주고 수익을 만들어가는 메이저 방송사가 이처럼 다른 채널에 광고를 게재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사례다. 그만큼 JTBC는 절실하게 2030세대의 팬덤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JTBC 챗봇을 하나 만들고, JTBC 콘텐츠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학습시켜서 세상에 내놓아 보면 어떨까? 고객 한 명, 한 명과 직접 관계를 맺고 거기서 얻은 고객 개개인에 대한 데이터를 통해 고객에 대한 대한 이해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고객 데이터를 활용하고 이용자 접점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 이용자 기반이 큰 대형 플랫폼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거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 엄두를 못 낼 일이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챗봇이 그 비용을 대폭 낮춰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한 번 시도해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