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루터 브랜드가 되다'로 본 인쇄기술 확산의 2가지 교훈

"가장 저명한 당신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각지각처에서 교황의 면벌부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들어본 적도 없는 면벌부 설교자들이 시끄럽게 떠벌리고 다닌다고 불평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비탄하는 것은 이 설교자들이 야기하고 각처에서 일반인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심각한 오해입니다. 저 불쌍한 영혼들은 면벌부를 사면,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 루터가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중. ('루터 브랜드가 되다' 123쪽 인용)

오늘은 신간 소개 겸 미디어 기술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21년 말 번역돼 출간된 앤드루 페트그리의 저서 '루터, 브랜드가 되다'의 인용문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 1483년 11월 아이스레벤 출신
  • 1501년 대학 등록(에르푸르트대학교) 위해 에르푸르트로 이주
  • 1507년 사제 서품(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 1508년 대리 강사로 비텐베르크대학교 부임
  • 1510년 로마 교황청에 특파원 자격으로 방문
  • 1517년 95개 반박문 게시 및 발행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구 인쇄기술 확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마르틴 루터입니다. 1398년 생인 구텐베르크와는 85살이나 차이납니다. 그가 1468년에 사망했으니 둘이 서로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주된 활동 지역도 마인츠(구텐베르크)와 비텐베르크(루터)로 적잖이 떨어져 있었고, 직업도 인쇄업자와 성직자 겸 교수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틴 루터는 인쇄혁명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죠. 이 책을 미디어 기술사의 공부거리로 삼은 이유입니다. 그것도 설 연휴 마지막 날에 말이죠.

이 책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1517년)과 인쇄기술의 관계를 촘촘하게 따라갑니다. 루터의 전기 같으면서도 독일 초기 인쇄기술사 같기도 합니다. 당대 혁신 기술로서 인쇄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티핑포인트를 넘어섰는지 역사적 맥락과 사료를 통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원서 자체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역사가로서 작가의 확신에 찬 사료 기반 기술이 많다는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마지막까지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얻은 배움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쇄 확산과 루터의 글쓰기 포맷

루터가 성직자이자 교수로서 근무했던 비텐베르크 지역이 일약 인쇄의 중심지로 거듭 난 데에는 루터의 왕성한 창작력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텐베르크 지역에서 인쇄된 발간물의 종수가 루터의 '논쟁 사건'(95개조 반박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입니다. 위 책에선 표로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최경은(2017)의  논문을 보면 그의 위대함이 증명이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지 않아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루터가 발표한 인쇄물들의 포맷입니다.

루터가 인쇄를 의뢰한 대부분의 발간물들은 8쪽 미만의 팸플릿 포맷이었습니다. 당시 인쇄 산업의 기술과 수요층의 특성을 감안한 루터의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인쇄업자들은 쪽수가 많은 두터운 책을 찍어내는데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단 종이값이 비쌌고, 활자 준비도 어려운데다, 최종본 발간에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어서입니다. 공들여 제작했다손 치더라도 팔릴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만약 팔지 못하면 재고로 쌓아둬야 하는데 이 또한 비용이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인쇄업자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포맷으로 핵심을 담아 논문들을 인쇄업자들에게 의뢰를 했습니다. 길지 않기에 빨리 인쇄할 수 있고, 팔리지 않더라도 손해를 덜 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으로 당시 가장 뜨거운 인물이 돼 있었기에 흥행도 보장돼 있었습니다. 그 덕을 초기에 가장 많은 본 이가 노인으로 소개되는 '라우-그루넨베르크'였습니다. 비텐베르크가 작은 인쇄업자에 불과했던 라우-그루넨베르크는 루터의 왕성한 다작력으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최경은(2017). 종교개혁기의 비텐베르크 - 인쇄문화를 중심으로. p. 48

다시 돌아오면, 루터의 8쪽 내외 팸플릿 포맷 전략은 인쇄혁명과 그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가 라이프치히를 제치고 인쇄혁명의 중심지로 서게 되는 수훈갑으로 작용하게 되는 거죠. 자신의 지적 깊이만큼이나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혁명의 티핑포인트를 넘기는 성과를 거둬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의 인쇄술 왜 대중화하지 못했나
“서책을 인출할 때 감인관, 감교관, 창준, 수장, 균자장은 한 권에 한 글자의 오자가 나오면 태(笞) 30대를 치고, 오자가 한 글자씩 늘어날 때마다 1등을 더한다. 인출장은 한 권에 한 글자가 혹 먹이 짙거나 희미하면 태 30대를 치고 한 글자마다 1등을 더한다. 틀린 글자수를 모두 합해 죄를 다스리되 관원은 다섯 자

인쇄 품질과 시각화(삽화)의 개발

이 책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은 아닙니다. 최경은(2017b)의 또다른 논문과 이 책의 일부 내용을 함께 보면서 배우게 된 대목입니다. 루터는 일종의 프로덕트 매니저로서 인쇄 품질에 상당히 예민했다고 합니다. '루터 브랜드가 되다'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라우-그루넨베르크에 인쇄를 맡기다 로터에게 넘긴 이유이기도 합니다. 투박하고 오탈자가 세련되지 못한 인쇄 품질은 루터에겐 늘 걱정거리였습니다.

바젤의 인쇄업자인 프로벤에 흠뻑 매료된 적이 있었던 루터는 라이프치히의 인쇄업자 로터에게 인쇄를 부탁합니다.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던 로터가 '종교 개혁가이자 저항가'인 루터의 저작을 인쇄한다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로터는 비텐베르크에 지사를 설립하는 형태로 루터와 손을 잡게 됩니다. 물론의 그의 아들 로터 2세가 비텐베르크 지사를 담당하게 되지만요.

확실한 건 인쇄 품질이 탁월했다는 점입니다. 라우-그루넨베르크가 사용했던 인쇄기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현격한 품질 차이가 존재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루터의 작품들에 삽화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어를 중심으로 교리를 쉽게 설명하고 교회의 부조리를 쉽게 설명하고 반박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인쇄에서 시각화 실험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대략 이 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삽화와 같은 시각물을 당대의 인쇄기술로 소화했다는 건 상당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시기(1516년) 우리나라에선  병자자라는 활자가 제작돼 쓰이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병자자로 인쇄된 서적들에도 삽화는 잘 보이지 않았던 듯합니다.

참고로 미디어 기술사 메뉴를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하시다면 아래를 클릭해 주세요.

미디어기술사 - 미디어고토사(Mediagotosa)
국내외 미디어 기술의 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주로 다룹니다.

  • "정말 놀라운 것은 루터가 너무나 빨리 그리고 본능적으로 인쇄업에서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요건에 맞춰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루터가 쓴 45편의 글 가운데 21편이 8쪽 이하였다. 인쇄 업자들은 최소한의 투자로 단번에 수익을 올렸다. 루터가 인쇄업을 위해 확실하고도 유망한 존재라는 사실이 금세 분명해졌다."(p. 165)
  • "루터 논쟁이 아우크스부르크와 바젤의 인쇄업에 끼친 영향은 독일 전체에서 일어난 좀 더 보편적인 인쇄업의 부흥을 보여준다. 루터에 대한 대중의 관심으로 인쇄업자들은 즉각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이를 다른 출판 프로젝트에 재투자할 수 있었다. 1517년과 1520년 사이에 발행된 출판물 수는 전체적으로 두 배가 되었으며 1523년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출판한 모든 책보다 세 배 더 많은 책을 찍어냈다."(p. 167)
  • "활자와 관련해 유럽에서 가장 앞선 금속산업(루터의 아버지는 이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을 보유했던 독일은 운이 좋았다."(p. 167)
  • "인쇄업자는 일정량의 연에 해당하는 종이를 받고 그 대가로 절반에 준하는 인쇄된 용지를 주었다 그러면 제지업계의 거물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팔았다. 이는 종잇값이 완성된 책값의 50퍼센트에 상당하는 관계적 계산법을 반영한 거래였다. 또한 종이 수요가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그 증가량이 어느 정도의 부수를 출판하면 종이가 얼마만큼 들겠다고 원래 추산했던 수치보다 다소 더 낮았을 것이다."(p. 168)
  • "신간 서적의 출판은 위험한 사업이었다. 수요를 너무 적게 추산하면 신판 개편 작업에 또 1년이 걸릴 것이다. 수요를 너무 많게 추산하면 그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고 비싸게 인쇄한 용지의 대부분은 몇 년 동안 창고에서 썩을 것이다. 반면에 루터의 팸플릿 출판은 이틀 정도면 준비가 되었고 판매도 사실상 보장된 것이다 다름 없었다. 그리고 독일어 책이라면 대부분 현지 시장이었기 때문에 배송 비용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p. 169)
  •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인정받는 인쇄업자 가운데 하나인 멜히오르 로터를 택했다. 이미 149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책을 간행했던 로터는 당시 독일 인쇄업계의 노련한 경력자였다. 사업을 견실하게 키웠고 1517년 무렵에는 거의 500종의 출판물을 냈다.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루터가 로터를 각별히 선호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p. 171)
  • "1518년 로터는 루터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첫번째 공격인 '반박'과 교황청이 루터의 면벌부 가르침을 정죄하는 글 두 판을 간행했다. 그러나 몇 주 후에 그는 루터의 글을 출판하고 있었다."(p. 172)
  • "루터의 마음을 끈 요소는 중대한 라틴어 작품들을 출판한 인쇄업자로서 로터가 누린 명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우-그루넨베르크의 작업에서 가장 심각하게 부족한 면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단순하고 장식 없고 실용성만 고려한 출판물은 촌티가 났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커리큘럼 개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를 열망했다. 게다가 폭넓은 지식인 공동체인 독자들이 루터의 글을 읽고 있었다."(p. 172)

참고 문헌

  • 최경은. (2017). 종교개혁기의 비텐베르크-인쇄문화를 중심으로. 유럽사회문화, (18), 37-62.
  • 최경은. (2017). 종교개혁기의 삽화. 유럽사회문화, 19, 16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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