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이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
리프먼이 저널리즘을 정의해 가는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당대 민주주의의 변화와 문제를 분석했고, 여기서 여론-행정부의 관계가 국가의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여론이 중요해진 시기였죠. 당연히 여론의 형성 과정을 탐구했고, 무엇보다 여론의 형성 주체로서 공중은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에 다가가기
리프먼이 저널리즘을 정의해 가는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당대 민주주의의 변화와 문제를 분석했고, 여기서 여론-행정부의 관계가 국가의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여론이 중요해진 시기였죠. 당연히 여론의 형성 과정을 탐구했고, 무엇보다 여론의 형성 주체로서 공중은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에 다가가기
미국 공영방송 NPR의 정보원 추적 플랫폼 ‘DEX’가 주목을 끌고 있네요. Poynter가 나름의 의미를 덧붙여 이를 조명했고, NPR도 정보원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다양성을 위한 노력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개된 여러 관련 기술과 비교했을 때 대단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미 언론이 정보원 다양성을 조직 차원에서 얼마나 비중있게
경제신문이나 경제 기사 많이 읽으시죠? 코로나19로 정부의 재정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재난지원금 등에 대한 기대들이 많이 오갈 때 경제신문이나 경제 기사에 대한 의존은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부동산 정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와 세금 정책을 어떤 식으로 설계하고 발표하느냐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자산의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당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저널리즘의 역할 모델 - 용수철 모델 용수철 쓰거나 볼 일 자주 없으시죠? 오늘은 용수철 얘기로 시작을 해야 할 듯합니다. 용수철은 힘을 가했을 때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복원력을 핵심 성질로 갖습니다. 늘어나는 성질을 탄성, 아예 이 성질을 잃어버린 상태나 속성을 소성이라고 합니다. 탄성을 넘어 소성으로
당대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들 - 사회적 다원주의의 위기와 양극화 사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한국 저널리즘의 품질과 큰 관계 없이 개선되고 진보해 왔습니다. 여러 이론들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관계는 직접적인 함수관계가 아니다”(임상원, 2018, p.340)거나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리프먼도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저널리스트 자긍심의 복원은 저널리즘과 민주주의의 연결 관계를 탐색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 공공적 가치와 결합하지 못하고 그것과의 함수관계가 과거보다 더 모호해진다면 저널리스트라는 전문직으로서 호칭과 위상은 사회적으로 평가받기 어려워집니다. 그저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고소득 직종 혹은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과의 관계 맺기가 가능한 특권 계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저널리즘 규범과 강령은 한국 사회, 한국 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널리즘 영역에서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일까요? 저널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기여와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조금더 좁혀서 한국의 저널리즘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문득 궁금해서 빅터 피카드(Victor Pickard) 교수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이나 최근 인터뷰 등을 보면 빅터 교수가 공적 지원의 대안적 형태로 우리나라의 언론진흥재단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 가지는 한국언론진흥재단 모델에 대한 그의 생각, 나머지 한가지는 공적 저널리즘 재단의 거버넌스 구조에
신화나 신념은 가끔 저널리스트들의 비판적 의심을 짓누르거나 은폐한다. 그 가운데 으뜸은 저널리즘이 당연히 민주주의에 기여한다고 하는 신념 체계다. 이미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20세기 초반 구축된 이 이론과 신화는 좀체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신봉하는 저널리즘의 민주주의 이론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 민주주의는 균형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사라지는 자기통치의 체계이다. (몽테스키외 “인민들은 한편으로는 군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이기 때문이다”) ◇ 효율성은 많은 복지의 분배형태들과 양립할 수 있다.(민주주의와 시장 150p) ◇ 자본주의는 경쟁적 균형상태 하에서도 비효율적이다. ◇ 자본주의가 기술적으로 실현가능한 복지의 분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자본주의
개인적으로, 기자들이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를 도식적으로 연결시키는데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뉴스가 혹은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의 보루이며 나아가 민주주의 고양하는데 필수적 요소라고 인식하기 쉬운데, 이를 입증할 만한 조건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등식화하는 건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아웃링크 논쟁에서 이러한 도식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전제하는 경우들이 잦은 것 같은데요. 아래 책의 한 문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