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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최고 AI를 쓰던 시대가 끝나고 있습니다

Fable 5 사태 이후, AI는 ‘접속하는 서비스’에서 ‘허가받는 자산’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Anthropic의 Fable 5 사태를 다뤘습니다. 핵심 질문은 “소버린 AI가 필요한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 누가 지능의 접근권을 통제하는가.
  • 그리고 누군가 지능의 수도꼭지를 잠갔을 때, 우리는 계속 일할 수 있는가.

Fable 5, Mythos, Alignment, 지능 접근권의 문제에 대한 기본 설명은 지난 글을 참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지난 글이 “왜 이 사건이 중요한가”를 설명했다면, 이번 글은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룹니다.

저는 Fable 5 사태가 AI 산업의 세 번째 국면을 열었다고 봅니다.

  • 첫 번째 국면은 2022년 11월 ChatGPT의 등장입니다. AI 1기는 “말 잘하는 챗봇”의 시대였습니다.
  • 두 번째 국면은 2025년 11월 하네스와 에이전트의 등장입니다. AI 2기는 “일을 처리하는 에이전트”의 시대였습니다.
  • 세 번째 국면은 2026년 6월 최상위 AI의 접근권이 계층화되는 시대입니다. AI 3기는 “그 에이전트가 쓸 수 있는 지능이 차등 배급되는 시대”입니다. Fable 5 수출통제는 이 세 번째 국면이 시작됐다는 신호입니다.

AI 1기: ChatGPT가 모든 것을 시작했습니다

AI 시대를 정의한 첫 번째 사건은 2022년 11월 ChatGPT의 등장입니다. 그 전에도 AI는 있었습니다. 번역, 추천, 검색, 광고, 이미지 인식, 음성 인식 곳곳에 AI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 AI는 보이지 않는 기술이었습니다. 서비스 뒤편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기능이었습니다.

ChatGPT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AI와 직접 대화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글을 쓰고, 코드를 만들고, 요약을 부탁하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AI는 더 이상 백엔드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이용자가 직접 만지는 인터페이스가 됐습니다. 이것이 AI 1기입니다. AI 1기의 핵심 질문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 “AI에게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 “어떤 프롬프트를 넣으면 더 좋은 답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한동안 “질문이 중요한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AI 활용의 핵심 역량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프롬프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AI 1기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챗봇은 대답합니다. 하지만 일을 끝내지는 않습니다.

저는 2024년 12월에 출간한 『AI 에이전트 시대, 경제의 주인이 바뀐다』에서 에이전트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했습니다. 당시에도 에이전트는 중요한 방향이었습니다. 이용자의 지시를 받아 여러 단계를 수행하고, 도구를 쓰고, 사람 대신 일부 업무를 처리하는 AI가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돌아보면, 2025년 말 이전의 에이전트와 바이브 코딩은 아직 초기적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가능성은 분명했지만, 긴 작업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한두 단계는 처리할 수 있었지만, 복잡한 업무 전체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검증하고, 다시 수정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2024년과 2025년의 에이전트는 방향이었습니다. 2025년 말 이후의 에이전트는 작동 방식입니다. 그 차이를 만든 것하네스였습니다.

AI 2기: 하네스가 에이전트를 실제 작업 시스템으로 바꿨습니다

AI 시대를 정의한 두 번째 사건은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에 걸쳐 본격화된 에이전트형 작업 환경입니다. 대표적으로 Claude Code, Claude Cowork, OpenClaw, Codex 같은 흐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모델 성능만이 아닙니다. 모델이 일할 수 있는 작업대가 생긴 것입니다. 하네스는 모델을 둘러싼 실행 구조입니다. 모델 자체가 아니라, 모델이 낸 판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장치입니다. 파일을 읽고, 코드를 실행하고, 외부 도구를 호출하고, 중간 결과를 저장하고, 오류가 나면 다시 시도하고, 별도의 검증 에이전트가 결과를 점검하도록 만드는 작업 환경입니다. 모델 하나가 똑똑해진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델이 일할 수 있는 도구함, 메모리, 상태 추적, 검증 절차가 함께 갖춰져야 합니다. 이때 에이전트의 Task Horizon이 크게 길어집니다.

Task Horizon은 AI가 한 번의 요청을 받고 끝내는 작업 범위를 말합니다. AI 1기의 Task Horizon은 짧았습니다. 질문 하나, 답변 하나가 기본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네스 이후의 에이전트는 다릅니다. 문제를 쪼개고, 계획을 세우고, 여러 도구를 쓰고, 중간 결과를 저장하고, 다른 에이전트에게 일부 작업을 맡기고, 마지막에는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합니다.

(이미지 출처: METR)

위 그래프는 AI 모델이 50% 확률로 성공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작업의 길이, 즉 Time Horizon이 얼마나 빠르게 늘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작업 길이는 AI가 실제로 걸린 시간이 아니라, 숙련된 인간이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측정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그래프가 로그 스케일이라는 것입니다. 증가폭이 완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초 단위 작업에서 분 단위, 분 단위에서 시간 단위, 다시 하루에 가까운 작업으로 올라가는 기하급수적 증가입니다. 예를 들어 4초짜리 작업에서 16시간짜리 작업으로 늘어난 것은 단순히 조금 길어진 것이 아니라, 약 1만4천 배 길어진 것입니다. 이 변화는 AI가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모델”에서, 계획하고, 도구를 쓰고, 상태를 추적하고, 오류를 검증하면서 긴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형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I 1기의 이용자는 질문을 잘해야 했습니다. AI 2기의 이용자는 일을 잘 맡겨야 합니다. AI 1기에는 “답변”이 중요했습니다. AI 2기에는 “완료”가 중요합니다. 이 AI 2기, 즉 하네스의 시대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모델 성능만으로는 에이전트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모델과 하네스가 결합될 때, AI는 실제 업무 시스템이 됩니다.

AI 3기: 최상위 모델을 누구나 쓰던 시대는 끝나고 있습니다

ㅂㅈ22zFable 5 사태는 AI 3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최고 AI 모델도 어느 정도는 이용료를 지불하면 누구가 쓸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용카드를 등록하고, 구독료를 내고, API 키를 받으면 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국이나 일부 제재 대상국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한국 기업과 개발자 입장에서는 대체로 “돈을 내면 쓸 수 있는 글로벌 서비스”였습니다.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Fable 5는 Anthropic이 공개한 Mythos급 모델입니다. Mythos는 사이버보안과 과학 연구에서 매우 강력한 능력을 보인 모델로, 원래 제한된 조직에만 접근이 허용됐습니다. Fable 5는 이를 일반 기업과 유료 이용자에게 공개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붙인 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전장치는 이미 중요한 단절을 만들었습니다: 위험한 사이버보안, 생물학, 화학 관련 요청은 Fable 5가 직접 답하지 않고 더 낮은 모델로 우회했습니다. 이용자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민감한 부분은 AI 모델 개발 관련 제한이었습니다. Fable 5를 이용해 다른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하거나 연구하려는 경우, 모델의 능력이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이용자가 그 사실을 알기 어려운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안전장치(Alignment)가 아닙니다. 가장 강한 AI 모델이 경쟁 AI 모델을 만드는 도구로 쓰이지 못하게 설계된 것입니다. Anthropic은 이것을 안전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장경쟁 관점에서 보면 이는 경쟁자를 늦추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AI 기업이 “안전”을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실제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안전”은 시장 진입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위험을 정의하는가, 누가 접근권을 주는가, 누가 제한을 거는가에 따라 산업의 권력 구조가 바뀝니다. Fable 5는 이 변화를 보여준 첫 사례입니다.

이제 최고 모델은 ‘개봉 창구’를 갖게 됩니다

앞으로 프론티어 AI 기업들은 모델을 (과거) 영화처럼 배급할 가능성이 큽니다. (과거) 영화는 한 번에 모든 곳에 풀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극장에 개봉하고, 그다음 VOD로 가고, 그다음 스트리밍으로 갑니다.

AI 모델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모델은 먼저 내부 연구자에게 갑니다. 그다음 소수의 전략 고객에게 갑니다. 그다음 정부와 신뢰된 파트너에게 갑니다. 그다음 사용량 기반 고가 API로 제공됩니다.
마지막으로 일반 구독자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됩니다.

우리가 익숙했던 “최고 모델을 웹에서 바로 쓰는 시대”는 과도기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격 차등이 아닙니다. 접근권 차등입니다. 모두가 같은 모델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Mythos를 쓰고, 누군가는 Fable을 씁니다. 누군가는 안전장치가 풀린 모델을 쓰고, 누군가는 제한된 모델을 씁니다. 누군가는 새 모델을 오늘 쓰고, 누군가는 몇 달 뒤에 씁니다. “나에게는 Mythos, 당신에게는 Fable.” 이 문장이 앞으로 AI 시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조치는 거칠었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Fable 5 사태는 Anthropic의 자체 제한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가 개입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Fable 5와 Mythos 5에 대해 외국인 접근을 제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외국 정부나 외국 기업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밖에 있는 외국인은 물론이고, 미국 안에 있는 외국 국적자도 포함됐습니다. 심지어 Anthropic 내부의 외국 국적 직원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사실상 부분 차단이 불가능합니다. 현대 AI 기업은 글로벌 조직입니다. 직원도 글로벌하고, 고객도 글로벌하며, 클라우드 인프라도 글로벌하고, 파트너도 글로벌합니다. 이런 구조에서 “외국인은 직접 또는 간접 접근하면 안 된다”는 지시는 실제로는 전면 중단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Anthropic은 Fable 5와 Mythos 5를 모든 고객에게서 끊었습니다.  이 조치는 다소 거칠고, 과격했습니다. 아마 그대로 오래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미국 AI 기업들도 글로벌 시장이 필요하고, 미국 정부도 동맹국과의 사이버보안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앞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에게 조건부 접근을 허용하는 방식이 논의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큰 방향은 분명합니다. 미국은 이제 AI 모델 접근권 자체를 전략 자산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수출통제는 칩과 장비를 겨냥했습니다. GPU, HBM, 노광장비,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가 통제 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델이 통제 대상이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델이 만들어내는 능력, 즉 지능 접근권이 통제 대상이 됩니다. AI 3기의 핵심은, 최고 AI는 더 이상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KYC가 AI에도 들어올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변화는 KYC입니다. KYC는 “Know Your Customer”의 약자입니다. 은행이나 금융회사가 고객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거주지를 확인하고, 자금 출처를 확인합니다. 돈세탁, 테러자금, 제재 회피를 막기 위해 필요합니다. 이제 비슷한 절차가 최고 AI 모델에도 들어올 가능성이 큽니다.  앞으로 최상위 모델을 쓰려면 단순히 이메일과 신용카드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국적, 소속, 사용 목적, 산업 분야, 데이터 종류, 보안 체계, 내부 통제 절차를 확인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개인 개발자와 스타트업은 불편해질 것입니다. 중소기업은 접근 장벽이 높아질 것입니다. 제3자 API 리셀러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반면 대형 클라우드와 모델 개발사 직접 API의 힘은 더 커질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입니다. 지금까지는 OpenRouter같은 서비스가 여러 모델을 한 곳에서 쉽게 호출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최상위 모델이 KYC, 접근 제한, 사용 목적 심사를 요구하게 되면, 이런 제3자 API 서비스가 모든 최고 모델을 지금처럼 쉽게 제공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모델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간급 모델, 오픈 모델, 저가 모델은 여전히 (이른바) 셀프서비스로 제공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모델, 특히 사이버보안, 생물학, AI 연구, 첨단 산업 설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모델은 점점 더 닫힐 것입니다.  Self-Serve API는 남을 가능성이 높지만, 하지만 최고 모델의 Self-Serve API는 줄어들 것입니다.

한국의 문제: 우리는 가까운 고객인가, 먼 고객인가

이 변화는 한국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 기업은 미국 프론티어 AI 기업들에게 얼마나 가까운 고객일까요? 한국은 반도체에서는 강자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HBM과 메모리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제조업도 강하고, 통신망도 좋고, 산업 데이터도 많습니다. AI를 적용할 현장도 많습니다. 그러나 프론티어 모델 자체에서는 한국이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최상위 모델은 미국의 OpenAI, Anthropic, Google DeepMind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DeepSeek, Qwen, Kimi 같은 강력한 오픈 계열 모델을 빠르게 내놓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 사이에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최상위 모델 접근권이 계층화되면 한국 기업은 미묘한 위치에 놓입니다. 미국 기업은 미국 AI 랩과 가깝습니다. 전략 고객으로 먼저 접근할 가능성이 큽니다. 공동 개발, 전용 계약, 산업별 맞춤 모델, 조기 접근 프로그램에 들어갈 가능성도 높습니다. 한국 기업은 동맹국 기업이지만 자동으로 같은 접근권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이번 Fable 5 사태가 바로 그 점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이 Project Glasswing 같은 글로벌 보안 협력에 참여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판단 하나로 접근권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기업에 실질적 문제를 만듭니다. 만약 미국 제약사는 Mythos급 모델로 신약 후보를 찾고, 한국 제약사는 제한된 Fable급 모델만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 보안 기업은 최상위 사이버 모델로 취약점을 찾고, 한국 보안 기업은 한 단계 낮은 모델만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 제조 기업은 최신 에이전트 모델로 공정 최적화를 하고, 한국 제조 기업은 몇 달 늦게 같은 모델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AI는 범용 기술입니다. 제약, 반도체, 자동차, 금융, 법률, 미디어, 교육, 국방, 제조를 모두 바꿉니다. 최고 AI 접근권의 차이는 곧 산업 경쟁력의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 ‘AI 소비국’에서 한 단계 더 내려갈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은 AI 기술 나아가 디지털 기술의 적지 않은 영역에서 소비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클라우드는 미국 플랫폼을 썼습니다. SaaS도 미국 제품을 많이 썼습니다. 검색, 광고, 모바일 운영체제, 협업 도구도 미국 플랫폼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물론 한국은 반도체, 제조, 통신, 인터넷 서비스에서 강점이 있습니다. 완전한 소비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클라우드에서는 미국 의존도가 작지 않습니다. AI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클라우드나 SaaS는 비용을 내고 쓰면 생산성이 올라가는 도구입니다. 대체재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론티어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기업의 지식 생산, 연구 개발, 제품 설계, 의사결정, 자동화 체계에 직접 들어갑니다. AI가 기업의 핵심 가치 창출 과정에 들어가면, 모델 접근권은 곧 사업 능력이 됩니다. 여기서 한국이 한 단계 더 내려갈 위험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미국이 만든 디지털 기술을 사서 썼습니다. 앞으로는 미국 기업이 AI로 만든 제품을 다시 사게 될 수 있습니다. 즉 기술의 소비자에서, 기술 소비자가 만든 결과물의 소비자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기업들이 최상위 AI를 이용해 신약 후보, 반도체 설계, 로봇 소프트웨어, 금융 상품, 법률 자동화 시스템, 교육 콘텐츠, 제조 최적화 솔루션을 만든다고 해보겠습니다. 한국 기업은 그 AI 자체에 동등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완성된 제품만 사는 위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AI 시대의 가치사슬에서 점점 더 아래로 밀립니다.  이것이 Fable 5 사태가 한국에 던지는 진짜 경고입니다.

한국의 기회: 최고 모델 경쟁만이 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쉬운 답은 “우리도 최고 모델(SOTA)을 만들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장기적으로 한국도 자체 프론티어 모델 연구 역량을 유지해야 합니다. 국방, 공공, 보안, 한국어, 산업 특화 영역에서는 반드시 독자 모델과 독자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너무 늦을 수 있습니다. 한국이 당장 집중해야 할 영역은 따로 있습니다:  하네스, 멀티모델 시스템, 모델 라우팅, 오픈 모델의 안전한 재구성, 산업별 AI 워크플로이 그 영역입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독점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은 강력한 오픈 모델을 빠르게 내놓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 둘 중 하나만 고르는 나라가 아니라, 여러 모델을 조합하고, 검증하고, 산업 현장에 맞게 작동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모델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어떤 업무에는 프론티어 모델을 쓰고, 어떤 업무에는 오픈 모델을 쓰고, 어떤 업무에는 로컬 모델을 쓰며, 중요한 판단에는 여러 모델의 답을 비교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 구조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능력이 앞으로 한국의 AI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OpenRouter Fusion이 보여준 방향

최근 OpenRouter가 공개한 Fusion API는 이 방향을 잘 보여줍니다. 방식은 단순합니다. 하나의 질문을 여러 모델에 동시에 보냅니다. 각 모델이 답을 냅니다. 그다음 judge 모델이 답변들을 비교합니다. 어디서 의견이 일치하는지, 어디서 충돌하는지, 어떤 답변이 놓친 부분은 무엇인지, 어떤 답변이 독특한 통찰을 담고 있는지 분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를 합쳐 하나의 답변을 만듭니다.

이 방식은 인간 팀 회의와 비슷합니다. 한 명의 천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대신,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를 종합하는 방식입니다. OpenRouter의 DRACO 벤치마크 결과에서는 Fable 5와 GPT-5.5를 결합한 Fusion 구성이 단일 Fable 5보다 높은 점수를 냈습니다.

(이미지 출처: OpenRouter)

더 흥미로운 것은 저가 모델 조합입니다. Gemini 3 Flash, Kimi K2.6, DeepSeek V4 Pro 같은 모델을 조합한 패널이 GPT-5.5와 Opus 4.8을 넘어섰고, 비용은 크게 낮췄습니다. 물론 이 결과를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작업에서 멀티모델이 최고 모델을 이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코딩, 장기 작업, 에이전트 실행에서는 여전히 최상위 단일 모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OpenRouter도 Fusion이 Fable의 완전한 대체재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최고 모델 접근권이 제한될수록, 여러 모델을 조합하고 검증하고 합성하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한국형 Fusion, 한국형 모델 라우터, 한국형 산업 하네스, 한국형 AI 워크플로 운영체계가 필요합니다.

모델 하나가 아니라 ‘모델 포트폴리오’를 운영해야 합니다

앞으로 기업의 AI 전략은 특정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AI 시스템은 이렇게 구성될 수 있습니다.

  • 가장 어려운 전략 판단은 미국 프론티어 모델에 맡깁니다.
  • 민감한 내부 문서 요약은 국내 서버의 (한국 또는 중국의) 오픈 모델로 처리합니다.
  • 반복적인 고객 응대는 저비용 모델로 처리합니다.
  • 코딩 리뷰는 코드 특화 모델과 일반 모델을 함께 씁니다.
  • 법률 및 계약 검토는 전문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된 모델을 씁니다.
  • 중요한 의사결정은 여러 모델의 답변을 비교한 뒤 사람에게 넘깁니다.

이 구조에서는 모델 하나가 꺼져도 전체 시스템이 멈추지 않습니다. Fable이 막히면 Opus, GPT, Gemini, Qwen, DeepSeek, Kimi, 국내 모델, 로컬 모델로 일부 업무를 전환할 수 있습니다. 품질은 떨어질 수 있지만 업무는 계속됩니다. 이것이 AI 시대의 회복탄력성입니다. 한국 기업은 “어떤 모델이 가장 좋은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업무에 어떤 모델을 쓸 것인가, 모델이 바뀌면 얼마나 빨리 전환할 수 있는가, 답변 품질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민감 데이터는 어디서 처리할 것인가, 여러 모델의 결과가 충돌하면 누가 판단할 것인가, 어떤 작업은 반드시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가 등입니다.이 질문에 답하는 능력이 앞으로 기업의 AI 경쟁력이 됩니다.

중국 오픈 모델은 기회이지만, 그대로 쓰면 안 됩니다

한국이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 중 하나는 오픈 모델입니다. 특히 중국의 오픈 모델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DeepSeek, Qwen, Kimi 같은 모델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일부 모델은 비용 대비 성능이 매우 뛰어나고, 오픈 웨이트로 제공되기 때문에 직접 내려받아 수정하거나 내부 환경에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미국 프론티어 모델 접근이 제한될수록, 이런 오픈 모델의 가치는 더 커집니다. 그러나 중국 모델을 그대로 쓰면 안 됩니다. 첫째, 신뢰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 모델은 중국의 정치적 환경과 규범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정 주제에서 답변이 왜곡되거나 회피될 수 있습니다. 둘째, 데이터 보안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 사업자가 호스팅하는 모델에 한국 기업의 민감 데이터를 넣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제조, 반도체, 국방, 금융, 의료 데이터는 절대 가볍게 다룰 수 없습니다. 셋째, 라이선스와 공급망 문제가 있습니다. 오픈 모델이라고 해서 모든 사용이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상업적 사용, 파생 모델 공개 의무, 데이터 사용 조건을 꼼꼼히 봐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전략은 “중국 모델을 쓰자”가 아니라 “오픈 모델을 한국 환경에서 안전하게 재구성하자”입니다. 한국어 데이터로 보강하고, 한국 법과 산업 규범에 맞게 조정하고, 보안 검증을 거치고, 국내 인프라에서 운영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중국 오픈 모델, 미국 및 유럽 오픈 모델, 국내 오픈 모델을 모두 비교해 최적 조합을 찾아야 합니다. 이 작업은 완전히 새로운 초거대 모델을 처음부터 학습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무 효과도 빠르게 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소버린 AI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국산 모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권, 운영권, 평가권, 대체권입니다.

훈련 전략과 추론 전략을 분리해야 합니다

한국의 AI 정책은 훈련(training)과 추론(inference)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훈련은 모델을 만드는 일입니다. 막대한 GPU, 전력, 데이터, 인재,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상위 모델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은 매우 비쌉니다. 추론은 모델을 실제로 사용하는 일입니다. 기업 업무, 공공 서비스, 교육, 의료, 제조, 금융 현장에서 모델이 답을 만들고 행동을 수행하는 단계입니다. AI가 경제적 가치를 만드는 곳은 결국 추론입니다. 한국은 훈련에서도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원을 훈련 경쟁에만 쏟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단기적으로는 추론 인프라, 모델 라우팅, 하네스, 평가 시스템, 산업별 데이터 연결, 로컬 배포, 보안 운영 역량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기업이 당장 AI로 생산성을 높이는 곳은 훈련 클러스터가 아니라 업무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제조 공정에서 최고의 AI가 쓰여야 하며, 반도체 설계 검토에서 최상위 AI가 쓰여야 합니다. 금융 리스크 분석에서 프론티어 AI가 쓰여야 하여야 하며, 병원 문서 처리에서 상위 AI가 쓰여야 합니다. 공공 행정 자동화에도 수준 높은 AI가 쓰여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서 이용되는 AI도 높은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추론 전략입니다.

한국의 AI 주권은 “우리가 얼마나 큰 모델을 학습했는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핵심 산업 현장에서 AI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한국은 AI 하네스 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분명한 강점이 있습니다. 제조업 현장이 있고, 반도체 공급망이 있습니다. 통신 인프라가 좋고, 금융과 공공의 디지털 전환 경험도 축적되어 있습니다. 콘텐츠와 커머스 시장은 빠르게 움직이고, 기업의 실행 속도도 빠른 편입니다. 이 강점을 살리면 한국은 AI 하네스 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AI 하네스 강국이란, 세계 최고의 모델을 반드시 직접 만드는 나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모델을 조합하고, 산업 데이터와 연결하고, 업무 흐름에 붙이고, 품질을 평가하고, 위험을 통제하고, 실제 성과를 내는 능력이 강한 나라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제조업에는 수많은 전문 업무가 있습니다. 품질 관리, 설비 예지보전, 공정 최적화, 공급망 관리, 안전 점검, 기술 문서 관리, 고객사 대응, 인증 문서 작성 등이 그렇습니다. 이 업무들은 범용 챗봇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모델 하나가 아니라 시스템입니다. 모델이 도면을 읽고, 내부 표준서를 찾고, 설비 로그를 분석하고, 이상 신호를 해석하고, 조치안을 만들고, 담당자에게 넘기고, 결과를 기록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네스입니다.  이런 구조는 한국 기업이 잘 만들 수 있습니다.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모델 성능만이 아니라 업무 완성도에서 나옵니다. 한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 하나의 국산 AI 모델보다 AI 운영 생태계

정부 정책도 바뀌어야 합니다. 소버린 AI를 말할 때 자꾸 “한국형 초거대 모델 하나”로 논의가 좁아집니다. 물론 대표 모델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AI 운영 생태계입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공공과 국방, 사이버보안, 연구 영역에 독자 AI 운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 영역은 외국 모델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대학과 연구소가 오픈 모델을 안전하게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중국 모델이든 미국 및 유럽 오픈 모델이든 국내 모델이든, 한국어와 한국 산업 환경에 맞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산업별 하네스 개발을 지원해야 합니다. 제조, 의료, 금융, 법률, 교육, 공공, 미디어 각각에 필요한 AI 작업 계층은 다릅니다. 범용 모델 API를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넷째, 모델 라우팅과 멀티모델 평가 기술을 공공재처럼 키워야 합니다. 특정 기업 하나의 폐쇄 제품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모델을 비교하고 조합하고 감사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AI 산업정책입니다.

모델 하나가 아니라 ‘모델 포트폴리오’를 운영해야 합니다

앞으로 기업의 AI 전략은 특정 모델 하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업무에 최고 모델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업무를 저가 모델이나 로컬 모델로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업무의 성격에 따라 모델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전략 판단은 미국 프론티어 모델에 맡길 수 있습니다. 민감한 내부 문서 요약은 국내 서버의 오픈 모델이나 로컬 모델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고객 응대는 저비용 모델이 적합할 수 있습니다. 코딩 리뷰는 코드 특화 모델과 일반 모델을 함께 쓸 수 있습니다. 법률 및 계약 검토는 전문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된 모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여러 모델의 답변을 비교한 뒤 사람에게 넘겨야 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모델 하나가 꺼져도 전체 시스템이 멈추지 않습니다.

Fable이 막히면 Opus, GPT, Gemini, Qwen, DeepSeek, Kimi, 국내 모델, 로컬 모델로 일부 업무를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품질은 떨어질 수 있지만 업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AI 시대의 회복탄력성입니다. 한국 기업은 “어떤 모델이 가장 좋은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업무에 어떤 모델 조합이 적합한가”입니다.

기업이 해야 할 일: AI 의존성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은 지금 당장 AI 의존성 지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회사의 어떤 업무가 어떤 모델에 의존하고 있는가.  그 모델이 끊기면 어떤 업무가 멈추는가. 대체 모델은 있는가. 품질 저하를 감수하면 어느 수준까지 업무를 계속할 수 있는가. 민감 데이터는 어디로 나가고 있는가. 모델 제공사의 약관과 데이터 보관 정책은 무엇인가. 프롬프트와 스킬은 다른 모델에서도 작동하는가. 여러 모델의 결과가 충돌하면 누가 판단하는가. 어떤 작업은 반드시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면 AI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의존성을 만든 것입니다.

Fable 5 사태는 한 장의 공문으로 최고 모델이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다음에는 가격일 수 있습니다. 약관일 수 있습니다. 국가 규제일 수 있습니다. 데이터 보관 정책일 수 있습니다. 모델 제공사의 사업 전략일 수 있습니다.

AI를 진지하게 쓰는 기업은 모델 백업 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좋은 모델을 쓰되, 하나만 믿으면 안 됩니다. 프론티어 모델을 쓰되, 로컬 모델도 준비해야 합니다. 미국 모델을 쓰되, 다양한 오픈 모델도 실험해야 합니다. 국내 모델을 쓰되, 글로벌 모델과 품질을 계속 비교해야 합니다. AI 전략은 이제 구매 전략이 아니라 운영 전략입니다.

장기적으로 한국도 최상위 모델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네스와 멀티모델 전략이 중요하다고 해서, 한국이 자체 프론티어 모델을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한국도 최상위 모델 연구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국방, 사이버보안, 공공, 과학 연구, 한국어, 산업 특화 AI에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외부 모델을 평가하려면 내부 모델 이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외국 모델의 제한을 우회하려면 최소한의 자체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순서와 균형이 중요합니다. 모든 예산을 “세계 최고 국산 모델”이라는 구호에만 쏟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넓은 전략이 필요합니다. 상위 모델 연구, 오픈 모델 재구성, 추론 인프라, 하네스 개발, 멀티모델 라우팅, 산업별 AI 시스템, 평가와 감사, 보안 운영, 인재 양성. 이 모든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 진짜 AI 주권은 모델 파일 하나가 아닙니다. 모델을 만들고, 고르고, 조합하고, 운영하고, 감시하고, 대체하는 능력입니다.

더 어려운 시대가 옵니다

AI는 기존 SaaS와 다릅니다. SaaS는 업무를 편하게 해주는 소프트웨어였습니다. 회계, CRM, 협업, 문서관리, 디자인, 마케팅 자동화 도구들이 그랬습니다. 쓰면 편리하고, 생산성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대체재도 많았습니다. AI는 다릅니다. AI는 지식 생산 자체를 산업화합니다. 연구를 돕고, 설계를 돕고, 의사결정을 돕고, 코드를 쓰고, 문서를 만들고, 실험을 계획하고, 전략을 검토합니다. 기업의 핵심 가치 창출 과정에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기업도 핵심 업무에 2등급 도구만 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경쟁사는 최고 모델을 쓰는데, 한국 기업은 제한된 모델만 쓴다면 불만이 커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만이 커졌을 때는 이미 격차가 벌어진 뒤일 수 있습니다. Fable 5 사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건은 갑자기 벌어진 예외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시작된 흐름을 눈에 보이게 만든 사건입니다. 최상위 AI 접근권은 점점 더 정치화되고, 계층화되고, 상업화될 것입니다. 그때 한국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까요? 미국 모델의 늦은 사용자? 중국 오픈 모델의 단순 소비자? 국산 모델 하나에 기대는 방어적 이용자? 이 셋 중 하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국은 여러 모델을 실무적으로 조합하고, 산업 현장에서 성과를 내고, 민감 영역에서는 독자 운영권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자체 모델 역량을 키우는 복합 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최고 모델이 막힐수록 하네스가 중요해집니다

Fable 5 사태는 많은 사람에게 소버린 AI의 필요성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맞습니다. 소버린 AI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국산 초거대 모델 하나”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이번 사태가 보여준 더 큰 교훈은, 최고 모델을 누구나 쓸 수 있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상위 AI 접근권은 계층화될 것이고, 미국 기업과 정부는 누가 어떤 지능을 쓸 수 있는지 점점 더 많이 통제하려 할 것입니다. 중국도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때 한국이 잡아야 할 것은 모델만이 아닙니다. 하네스입, 멀티모델 시스템, 모델 라우팅, 오픈 모델의 안전한 재구성, 산업별 AI 워크플로가 집중해야할 영역입니다. 바로 추론 인프라입니다. 그리고 평가와 감사 능력입니다.

AI 1기는 챗봇의 시대였습니다. AI 2기는 하네스와 에이전트의 시대였습니다. AI 3기는 접근권이 계층화되는 시대입니다. 한국은 AI 3기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AI 2기의 핵심인 하네스 능력을 지금부터 키워야 합니다. 앞으로 중요한 질문, 최고 모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여러 지능을 조합해 계속 일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나라와 기업이 AI 3기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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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닷 에이아이에서 AI 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한 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및 석사를, 비텐-헤어데케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 연구원과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특임 교수를 거쳐, 미디어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및 투자회사 ㈜메디아티의 CEO로 활동했다. 2019년부터 2년간 대통령 비서실 디지털소통센터장을 맡았고, 현재는 ‘AI 경제’ 및 ‘디지털 전략’을 주제로 다양한 기업과 언론에서 강의하고 있다.

『생성 AI 혁명』, 『디지털 미디어 인사이트』, 『테슬라 폭발적 성장 시나리오』, 『보이스 퍼스트 패러다임』, 『알고리즘 사회』 등의 공저자이며, 『당장 써먹는 틱톡 마케팅』 저자이다.

프로필: www.linkedin.com/in/berlinlog >>
강연문의: berlinlog@mediasphe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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